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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뒤셀도르퍼 Jun 26. 2017

이 여자가 겉도는 방식

아무 말 대신 아무 사진

낯선 사람과의 접촉이, 만남이 어색한 사람이 있다. 스물몇 해 동안 쌓아온 모든 친화력, 대화력을 끌어다 써도 5분이 지나면 어색한 공기로 가득 해지는 그런 사람. 이 여자는 그렇다. 모국어로 살아도 이처럼 힘들었던 여자가 독일에 오고 나니 겉도는 시간은 더욱 길어졌다. 수많은 노력으로 일대일 상황은 견딜 수 있지만 세명이 모인 순간부터는 '말을 원래부터 못했던 사람'처럼 입을 굳게 다문다. 하지만 경청의 제스처로 미소를 보이며 가끔 고개를 끄덕이기도 한다. 그리고 어느 순간부터 천천히 주위를 살피고, 카메라를 든다. 


대학 때 생긴 습관이다. 

학과 특성상 항상 카메라를 소지하고 다녔다. 선배들과 잘 어울리는 다른 동기들과 달리 어디서든 겉돌았던 이 여자는 아무 말 대신 아무 사진을 찍었다. 다른 사람들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때, 여자는 그 어느 때보다 대상에 집중한다. 그 시작이 섞이고 싶지 않은 진심 때문이었는지, 그저 관심을 받고 싶은 행동이었는지는 모른다.  


소심하고 내성적인 이 여자가 어떤 상황에서 왜 사진을 찍는지, 간단한 사례 몇 개를 통해 소개하고자 한다.


사례 연구 1. 중앙역에서 만나기로 한 사람들을 기다리던 와중. 가장 친하지 않은 사람이 와서 누군가 올 때까지 대화를 해야 할 때가 있다. '날씨가 참 좋지? 올 때 사람이 많지는 않았니?' 그다음에 별로 할 말이 없다. 아무 말 대잔치라도 해야 하는데 그마저도 어렵다. 어색함이 감돌 때 어깨 위 카메라가 구원투수. 뭐든 찍는다. 그러다 보면 누군가 오겠지.



사례 연구 2. 지인의 친구와 식사를 한다. 지인의 친구는 전날 처음 본 사이. 식사 초반은 모두가 이야기할 수 있는 주제로 이어지지만 어느 순간 지인과 지인의 친구만 아는 대화를 시작한다. 전혀 낄 수 없는 상황. 테이블에는 식사 전 음식을 찍었던 카메라가 놓여있다. 고개를 돌려 레스토랑을 둘러보니 사람들의 양태가 재미있다. 찍어야지. 



사례 연구 3. 독일어를 못하는 한국인과 한국어를 못하는 독일인은 영어로 소통하기 마련이다. 여기에 영어만 하는 한국인과 독일어만 하는 한국인이 추가되면 자연스레 대화는 영어로 진행된다. 언어에서도 소수자를 배제되기 마련. 소외된 대화에서 가장 자연스럽고도 편안한 것은 사진을 찍는 일이다. 대화하는 그들을 제외하고 모든 것이 피사체가 된다. 


사례 연구 4. 아무리 오래 알고 지냈어도 술 없이 맨 정신으론 2시간 이상은 어색한 관계가 있다. 이 여자가 종종 사진을 찍는 것에 놀라지 않는 지인이 대부분이기 때문에 대화가 끊기면 주섬주섬 카메라를 꺼낸다. 


사례 연구 5. 길에서 우연히 '아직 덜 친한' 혹은 '굳이 인사하고 싶지 않은' 사람을 보게 되면, 카메라를 꺼내 사진을 찍는 척을 한다. 이때는 진심이 아니고 그런 체를 하는 셈인데. 시작은 그렇지만 찍다 보면 그냥 또 무아지경에 빠지게 된다. 



'세 명이 만나면 한 명은 몽상가가 된다' 이 여자는 아무 말 대신 아무 사진을 찍다가 생각난 그 한 문장을 메모했다. 대화에 끼기 위해 치열하게 눈치 보는 대신 치열하게 사진 찍는 순간을 택한 그녀에게 이 문장은 확고한 사실이다. 대화에 들어갈 수는 없지만 대화 바깥에서 누군가 원하는 리액션을 해주는 일. 그러면서도 그의 몽상 세계와 그 안에서 하나 둘 생기는 사진을 제어하는 일. 저 문장에 남은 한 명의 몽상가는 '사회적'이라는 경계를 아슬아슬하게 지켜낸다. 


그리고 그녀에게 말과 사진은 형식만 조금 다를 뿐 소통에 필요한 똑같은 언어 일지 모른다. 소심하지만 말하고 싶은 욕망이 바깥으로, 사진으로 투영된 것일지 모른다. 그렇다고 그 몽상가를 위한 말판을 벌일 필요도 없을 것이다. 오히려 그녀가 원하는 것은 가만히 몽상가로, 사진을 찍게 내버려두는 것. 그리고 '사회적' 경계를 넘나들 때 어떤 관심을 받고 싶어 하지 않는 것. 일지도 모른다. 


겉돌지만 경계를 벗어나지 않는 것. 말하지 않지만 카메라를 드는 것. 서툴지만 이 여자가 이 세상을 살고 적응하는 하나의 방법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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