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뒤셀도르퍼 Jul 19. 2017

익숙함 버리기

'굳은 다짐'편

1. 사람이라는 것이 참 간사하다. 처음 독일 땅을 밟았을 때는 모든 것이 낯설어서 지나가는 간판 하나도 재미있게 보이더니 이젠 별 특이한 사람을 봐도 쉬이 카메라를 꺼내는 일이 없다. 심지어 다른 도시를 가도 낯설게 느끼는 것은 하루뿐이라서 '역시 유럽은 거기서 거기'라는 혼잣말을 할 때가 많다. 


2. 여러 일정 때문에 유난히 자주 방문하는 도시가 있다. 체코의 프라하가 그렇고, 크로아티아의 두브로브니크가 그렇다. 독일에서 거주하는 탓에 인근 도시, 알게 된 사람이 많아 일 년에 두 번 이상은 꼭 가게 되는 베를린도 그중 하나다. 


3. 서울에 살았을 때, 일 때문에 카메라를 들고 늘 서울을 방랑했다. 찍어야 하니 낯설게 바라봐야 했다. 아주 당연한 장소에서도 무언가 특별한 것을 찾기 위해. 인생의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고, 고단한 삶마저 녹아나는 서울을 바라볼 때는 익숙함이라는 특별한 마법이 작용한다. 무엇이든 덩어리로 바라보게 되고, 나에게 당장 필요한 정보가 아니라면 특별히 눈에 띄는 것이 없다. 자주 다니던 가게가 바뀌는 것이 아니라면 그곳은 나에게 늘 같은 장소였다. 


4. 삶의 터전이 한국에서 해외 어딘가로 바뀐다고 해서 익숙함이라는 마법이 약한 것은 아니다. 베를린 소니센터를 바라보며 종로 같음을 느끼고, 현재 거주하는 지역의 풍경을 보며 경기도 한 소도시 중심가에 와있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고국의 익숙함을 낯선 이곳으로 끌고 와 그곳처럼 느끼고 받아들인다. 심도 얕은 관찰에서 비롯된 가벼운 느낌. 그것은 비유를 넘어 단단히 붙어버린다. 

처음엔 원래 대문도 신기하고 예쁘고 그런 법이다.
오래된 트램을 탄 것도 신기하다. 귀찮음을 불사하고 카메라를 꺼낼 수 있는 것은 낯섦 덕분이다.

5. 한 도시에서 머문지도 어느덧 1년을 훌쩍 넘겼다. 처음에는 이 동네의 특별한 곳을 찾아다녔지만 그것도 오래가지 못하고 구글 지도 경로에는 온통 자주 다니는 마트로 가득하다. (또는 맛집, 단골집) 오늘은 뭐든 찍어볼까 해서 카메라를 가져가도 메모리에 2MB도 채우지 않고 돌아올 때가 많다. 익숙함이 눈을 가린 덕이다. 무엇을 찍어도 블로그 정보글에나 필요할 듯한 아주 실용적인 사진뿐이다. 


6. 익숙함에 눈이 가려진 상황은 현재 진행형이다. 아직 극복하지 못했고, 극복할 어떤 방법을 모색하는 중이다. 이번으로 4번째인 두브로브니크에서 무언가 다른 것을 발견할 수 있도록. 동네 앞에 슬리퍼를 끌고 가도 카메라를 챙겨볼 예정이다. 


7. 처음 도착해 길을 걸을 땐 목적지로 향하던 중에도 수많은 것에 고개를 돌리고, 자주 멈춰 서서 바라보거나 사진으로 남긴다. 두 번째 걸을 땐 찍었던 곳을 돌아보고, 세 번째는 오직 목적지만을 생각한다. 오직 목적지를 위한 과정은 그 길은 무척 따분하고, 길게 느껴진다. 그래서 도시에 돈을 흩뿌렸음에도 나에겐 그 도시가 기억으로 기록으로 남지 않는다. 가치 없는 시간으로 느껴질 만큼. 


8. 눈을 감아도 익숙한 그 길이, 숨 막히는 더위가 그대로 재현되는 그곳을 어떻게 낯설게 바라볼 수 있을까. 그것이 문제다. 언제나 처음처럼 같은 길을 걷고, 같은 곳에서 다른 것을 찾아낸다는 것. 숨은 그림 찾기 같은. 오늘 낯설어지기를 연습하자고 다짐한다.

매거진의 이전글 이 여자가 겉도는 방식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