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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뒤셀도르퍼 Jul 28. 2017

스스로 한계를 만들다

'익숙함 버리기' 실전 편

1. 수중에는 풀프레임 DSLR과 콤팩트 카메라, 즉석카메라, 휴대폰 카메라 등이 있다. 


2. 이 중에서 가장 사용빈도가 적은 것은 DSLR 카메라다. 평소에는 렌즈캡이라고 부를 만큼 작고 가벼운 (그리고 조악한) 50mm F1.8 렌즈가 장착되어 있다. 주로 일할 때만 사용한다. 일할 때는 다소 버거운 줌 렌즈가 함께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풀프레임 DSLR 용도로 나오는 줌렌즈는 콤팩트 카메라의 파워줌이 불가능할 뿐 아니라 무게와 크기도 상당하다. 그래서 모든 여행, 모든 개인적인 사진은 콤팩트 카메라를 99.9% 사용하고 있다.


3. 그러나 나는 안다. 센서 크기가 손톱보다도 작은 콤팩트 카메라보다 심도의 깊이가 다르다는 것을. 보정에서 상당히 자유로움을. 


4. 네 번째 방문할 크로아티아. 그곳에서 익숙한 시선을 버리기로 결정했을 때 눈에 밟힌 것은 결코 들고 다닐 일 없던 DSLR이다.


5. 32도를 웃도는 날씨가 일상인 크로아티아. 뙤약볕을 걷고, 땀을 비 오듯 쏟아야 하는 그곳에서 DSLR을 선택하는 것은 엄청난 도전이었다. 하지만 막상 DSLR로 사진을 찍어보니 어려운 것은 들고 다니는 일뿐만이 아니었다.  


6. 솔직히 말하면 첫 하루는 너무 답답했다. 놓치는 순간이 너무나 많았다. 50mm의 화각이 이렇게 답답한 것인지 오랜만에 느꼈다. 늘 메고 다니는 작은 가방에는 당연히 카메라가 들어가지 않아서 많은 사람들을 헤치고 지나갈 때 계속해서 불안감을 느꼈다. 어디에 부딪치지 않을까. 누가 훔쳐가려고 하지 않을까. 


7. 털컥, 털컥. DSLR 특유의 미러 쇼크 소리는 자꾸만 거슬렸다. 사일러스 모드를 해도 조용한 골목에서는 존재감을 당당히 드러냈다. 소리가 나면 사람들은 으레 피하거나 시선을 보냈다. 

8. 그러나 한 컷 한 컷에 신중해진 것은 사실이었다. 파인더로 촬영하는 것이 기본이기에 아무렇게나 셔터를 눌러댈 일이 없었다. 일할 때 버릇처럼 필요한 곳에 초점을 맞추는 습관도 신중함에 한몫을 했다. 콤팩트 카메라를 사용할 때는 반셔터를 눌러 적당한 곳에 초점이 맞았다 하면 그냥 촬영했다. 하나를 찍기 위해 아무리 빨리 움직여도 조금 느릴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마음에 드는 사진의 비율은 분명히 더욱 높아졌다. 

9. 앞뒤로 걸으면서 발줌을 하고 있는 것이, 이 화각으로 촬영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이 차츰 익숙해지자 재미가 붙었다. 같은 공간을 촬영해도 심도에서 나오는 공간감이 무척 달랐다. 그 매력을 오래 잊고 지냈다. 

10. 조악한 렌즈는 조금만 빛을 정면으로 받아도 초점을 잘 잡아내지 못하고, 사진으로 격렬한 난반사를 표출하기도 했다. 그래도 흔히 하는 후보정 프리셋으로 만든 것보다 마음에 들었다. 아무튼 이건 자연산이니까. 

11. 카메라는 점차 편해지고 있다. 사진을 처음 시작할 때만 해도 필름의 관용도와 노출을 보정할 수 있는 스탑에 대해 배웠고, 인화에서 버닝과 닷징의 한계를 실감하며 촬영할 때 조심하는 일이 많았다. 디지털카메라는 초기의 조악함을 벗어나자 2 스톱을 넘어서까지 보정이 되고, 색감을 자유자재로 조절했다. 촬영 때 전체 노출을 자동으로 알려주기도 한다. 오늘의 한계를 넘는 것이 내일의 과제인 것처럼. 한 해가 지나면 더 많은 것을 할 수 있는 카메라가 나왔다. 또 한 해가 지나면 같은 성능의 작고 가벼운 카메라가 나왔다. 


12. 나의 DSLR도 콤팩트도 이 과정 중에 탄생한 녀석들이다. 그중에서도 DSLR은 점차 그 위력을 잃고, 미러리스에 그 자리를 내주고 있다. 최신 미러리스는 성능도 거의 비슷하거나 여러 부분에선 이미 DSLR을 뛰어넘었는데 크기도 무게도 가볍기 때문이다. 


13. 그럼에도 나는 스스로를 한계 짓는 선택을 했다. 무거운 카메라와 한계가 분명한 단렌즈의 조합. 촬영은 태도를 바꾸는 것부터 시작해야 했다. 렌즈 조작하는 손가락 대신 담고 싶은 만큼 발이 움직여야 했다. 사람들이 있는 스냅에선 셔터 소리에 신경을 써야 했다. 전에 없던 불편함이 생기자 그 불편함을 극복하며 생기는 쾌감이 생겼다. 늘 지나던 골목에서 어떻게 나올까 궁금해 카메라를 들게 되고, 시도해보고자 자꾸만 파인더를 바라봤다. 

14. 익숙함을 버리는 것. 나는 그것을 앞선 글에서 숨은 그림 찾기라고 했다. 시야에 있음에도 시선에 배제됐던 숨은 그림. 나는 그것을 낯선 카메라로 찾아냈다. 낯선 화각과 낯선 단점, 결코 편하지 않았던 한계들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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