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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뒤셀도르퍼 Aug 04. 2017

필름 - 쓰다 - 기억

'익숙함 버리기' 실전 편

1. 필름을 손에 놓은 지 한참이 됐고, 다시는 쓸 생각이 없다고 공언했다. 

2. 필름을 쓰는 것은 여러모로 번거로운 일이었다. 넉넉한 시간과 돈을 들여야 함에도 결과물은 씁쓸할 때가 많았다. 어릴 적에만 해도 필름 카메라는 충실히 가족의 얼굴을 담아주던 것이었지만, 나에게 사진이 기념 이상의 이미가 됐을 때 필름으로는 한계를 느꼈다. 

3. 디지털은 감히 제2의 눈이라 할 수 있을 정도로 내가 보는 시선을 비슷하게 재현했다. 대부분의 상황을 컨트롤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촬영 직후 원하는 느낌이 아닐 경우 다시 촬영하면 되는 편리함. 그리고 컨트롤을 벗어나지 않는 충실함. 덕분에 사적인 기억은 대부분 디지털로 쓰여있다.  

4. 이 장점은 단점이 될 수 있었다. 눈으로 본 무언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이미지, 너무나도 현실적인 이미지는 지루했다. 그래서 일상을 말끔하게 뒤집어쓴 디지털 사진에 '필름 효과'라는 필터를 덧씌우기도 했다. 결국 디지털에서는 내가 가진 프레임의 한계를 벗어나기 위해 낯선 필름 색감을 끌어와야 했다. 하지만 그것은 익숙함을 사라지게 하는 적당한 방법은 아니었다.  


5. 오랜 사진을 정리하다 발견한 필름 카메라 사진. 과제나 작업이 아닐 땐 가벼운 콤팩트 필름 카메라를 가지고 다니면서 툭툭 찍는 습관이 있었다. 감도와 구도 같은 전형적인 것에 대한 고민 없이 촬영했다. 그리고 36컷에는 낯선 사진들이 있었다. 내가 찍었나 아니면 어쩌다 셔터가 눌린 건가 싶을 정도의 사진들. 그 이미지에서는 지금의 내가 쓰는 뻔한 프레임이 없었다. 당시 디지털 사진과 비교해도 그랬다. 

6. 여행 전 우연히 드럭스토어에 들렀다가 일회용 방수 카메라를 봤다. 가격은 제법 부담스러웠지만(7.50유로) 과거의 사진을 떠올리니 손이 절로 갔다. 수영을 못하니 바다에서 사진이나 한번 찍어볼까 했다. 가벼운 마음으로 물속에서의 기억을 필름으로 기록하기로 했다.

7. 함께 간 친구에게 수영을 배우면서 조금씩 찍어봤다. 촬영하면서 이 정도면 이런 사진이 나오겠지 하고 습관적으로 구도를 잡았던 것 같다. 

8. 독일에 돌아와 드럭스토어에 사진을 맡기고 열흘 뒤. 사진을 찾아온 친구는 웃음을 감추지 못했다. 도대체 얼굴 제대로 나온 사진이 하나도 없다고. 돌을 왜 이렇게 많이 찍었냐면서. 

9. 사진을 보니 그랬다. 얼굴이 잘리거나 제대로 나오지 않거나, 도대체 무엇을 찍었는지 모를 사진들. 뭐랄까 내 시선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카메라가 제멋대로 바라본 느낌. 

10. 시선의 어긋남 같은 느낌이다. 줄곳 카메라가 찍는 사람의 시선이라고 생각해왔는데. 제대로 배신당한 기분이다. 얘는 얘대로의 시선을 가지고 있던 것처럼. (사실 찍는 사람이 카메라의 화각과 성질을 파악하지 못해서 그런 것이지만) 소풍 때 어머니가 일회용 카메라를 쥐어준 적은 있지만, 직접 구매해서 촬영한 것은 처음이니 엉망일 수밖에 없다. 특별히 정보를 꼼꼼히 살펴본 것도 아니었고. 

11. 내 기억과 촬영 당시 머릿속 이미지와는 제법 거리가 있지만 그 나름의 매력이 있었다. 더 이상 필름 효과를 뒤집어쓴 디지털 사진이 아니었다. 필름은 아주 거칠고, 제멋대로 물속의 기억을 쓰고 있었던 모양이다. 

12. 야박한 26컷에 필름이 써 내려간 시간들. 셔터를 누른 것은 나였지만 어떤 이미지가 필름에 쓰일지는 조악한 카메라만 아는 것이었다. 

13. 익숙함이 없는 그곳엔 어딘가 다른 세상이 남아있었다. 필름에는 나의 컨트롤을 벗어난 그곳의 풍경이 담겨있었다. 내 사진의 끝없는 익숙함은 컨트롤이 그 원인이었을까. 


14. 새로운 사진, 낯선 사진을 위해 누군가는 일상의 공간을 벗어난다. 반면 나는 비일상의 공간에서의 익숙한 프레임이 지겨워서 덜 익숙한 카메라로 사진을 찍었다. 짧은 기간 두 번의 시도로 지금까지와는 조금 다른 기록을 남길 수 있었지만 사실 알고 있다. 이것 역시 잠깐의 방편이라는 것을. 아직 문제는 풀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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