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머지는 우리가 알아서 (기억)하겠습니다
1. 코닥의 유명한 카피 'You press the Button, we do the rest'(당신은 찍기만 하세요. 나머지는 우리가 알아서 하겠습니다.)는 자동카메라의 시대를 알렸다. 그리고 카피는 말하는 주체가 바뀌었을 뿐 여전히 유효하다. 그때는 카메라와 필름을 생산하는 기업이었다면, 현재는 어플이다. 찍기만 하면 또 다른 색을 입은 사진으로 저장된다. 또 과거의 사진이 기록을 위함이었다면, 최근의 사진은 적극적으로 기억을 대체하는 것처럼 보인다.
2. '여행에서 남는 것은 사진뿐이야'라는 말처럼 한 사람의 인생에서도 남는 것은 이름보다 사진일지 모른다. 태어났을 때부터 지금 현재까지의 사적 기록은 대부분 사진과 동영상으로 이뤄지기 때문. 어떤 세대는 두껍고 묵직한 사진첩을 넘기고, 요즘 세대는 컴퓨터나 휴대폰 속 갤러리를 드래그한다. 방식은 달라도 우리는 사진으로 과거를 기록해왔다.
3. 사진을 활용한 기록이 적극적인 기억의 형태로 바뀌게 된 배경에는 소셜 네트워크가 있었다. 미니홈피와 페이스북의 차이는 카메라를 쥔 사람들에게 제법 컸다고 생각한다. 불특정 다수의 사람들이 볼 수 있으며, 누군가의 좋아요로 쉽게 퍼지는 시스템. 좋아요를 누른 사람이 누구인지 몰라도, 내가 좋아요를 누른 사진의 소유자가 누구인지 몰라도 괜찮은 쿨한 시스템은 업로드하는 사진을 신경 쓰게 했다.
4. 나 역시 SNS에 올리는 사진에 신경을 쓰기 시작했다. 그렇게 시작된 노력은 여느 사람들과 다름없이 셔터를 누르게 했다. 직업적인 이유로 혹은 개인적인 이유로 멋진 풍경을 찾아 나서기도 했고, 그곳에서의 사진을 SNS에 올리며 여행 기록을 남겼다. 페이스북보다 이미지 위주인 인스타그램은 이미지로 기억하는 방식을 더 효율적으로 끌어올렸다. 해시태그는 이미지를 단어로 검색 가능하게 했다.
5. 쉽게 공유되고, 퍼지는 네트워크의 특성과 이미지 없는 포스팅이 불가능한 시스템의 결합. 사람들은 그 안에서 누군가의 이미지를 소비한다. 일면식이 없는 누군가의 계정에서 이미지를 통해 그 사람의 모습과 일상을 추측한다. 반대로 소비될 이미지를 위해 일상을 필터로 색칠하고, 가장 멋진 구도를 위해 발로 뛰거나 하트 받기 좋은 이미지를 걸어둔다.
6. 이미지가 기록을 넘어 기억의 대체재가 되고 있음을 느낀 것은 페이스북 여행 페이지의 급성장에서 볼 수 있었다. 저마다 다른 톤의 사진들 혹은 영상들은 '특정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는데, 그들이 어떻게 경험했든 보는 사람들, 좋아요를 누르는 사람들은 그 분위기로 그 나라를 이해하고 있었다. 주변 지인들 역시 여행을 기억할 때 사진에 새겨진 분위기로 파악하고 있음을 자주 본다. 특히 1년 이상 지난 여행을 기억할 땐 더더욱.
7. 스마트폰 사진 어플에 있는 '파리' 느낌이나 '런던' 분위기, '뉴욕'의 감성이라는 이름 붙은 필터들은 SNS에서 각광받던 특정 분위기를 만들어낸다. 이러한 필터들이 인기몰이를 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직접적인 목적은 SNS에 '이런 곳'에서 '이런 분위기'를 즐겼다고 자랑하기 위함일 것이다. 그리고 이 사진들은 훗날 사진으로 그 시공간을 기억할 때 '이런 분위기'였다며 착각하게 만들 것이다.
8. 기록과 기억은 한 끗 차이의 단어지만 의미는 다르다. 결혼식장에서 촬영하는 원판 사진이 기록이라면, 사진가를 고용해 촬영하는 스냅사진은 기억에 더 무게를 두고 있다. 그 시간, 그 공간에 존재했음을 전하는 사진과 특정 분위기가 감돌길 기대하며 촬영하는 사진이 다른 것이다.
9. 터치 한 번의 셔터로 어플이 알아서 이 순간을 포장해주는 시대. 자신의 일상이 필터 하나로 화사해지는 시대. 지금 여기를 함께 하는 사람들과 머리와 마음으로 해야 하는 기억을 포장된 사진에, 동영상에 맡기고 있는 것은 아닐까 생각해본다. 현실의 마음은 춥고 외로우면서, SNS에는 하나같이 뽀얗고 따뜻한 사진들을 보고 있자면 사진은 소망을 드러내고 있지 않나 싶기도 하다.
10. 길을 지나던 강아지 한 마리도 사진을 찍고 싶어 핸드폰을 꺼내는 요즘. 사진으로 기록되지 않은 기억은 얼마나 있을까. 그 기억의 무게는 기록된 것보다 가벼울까. 더 빨리 잊힐까. 아니면 오히려 또렷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