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전히 나이기 위해
'한국, 중국에서 온 여행자들은 말이야..'
'니하오'
'칭챙총'
'한국인들은 정말 다들 그러니?'
'한국 여자들은 말이지..'
'동양인들은..'
'동양에서 온 애들은..'
나는 꼬리표를 달고 다닌다. 피부색과 모국이 적힌 나의 꼬리표. 그리고 슬프게도 여행하며, 살아가며 나는 이 꼬리표만으로 인식된 적이 많다. '내가 누구인지'보다 '내가 어디에서 왔는지'가 더 중요했던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그 정보가 그들에게는 나의 모든 행동을 설명하는 유일한 책자였다. 그들의 책자 속에 적힌 한국 혹은 동양은 나조차도 그 내용을 알 수 없다. 내가 하는 행동과 말투를 이해하지 못했다면, 손쉽게 책자 속 정보로 '역시 동양인은..'이라고 단정하거나, 그 책자 속에 이해할 수 없는 '동양인의 행동'에 추가하면 그만이었다.
내가 전형적인 동양인인지, 전형적인 한국인인지 나조차도 알 수 없다. 한국에서 나는 그저 나였고, 독일에 발 딛고 사는 나 역시 그저 나일 뿐이니까. 똑같은 모국을 가졌지만 나와 같은 성격을 가진 친구를 본 적이 없다. 나와 같은 행동, 생각, 말투를 지닌 사람도. 그런데 어떻게 나는 항상 그들에게 '이해할 수 없는 동양인'이 되는 것일까.
사실은 나도 '철없는 누군가'로 치부하면 될 문제다. 하지만 나는 분노한다. 그 이유는 그 '이해할 수 없음'이 정말 이해하지 못해서가 아니라 이해하려는 노력조차 없었던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마치 별도의 '종'으로 치부하듯 뒷담화의 소재나 놀림거리, 선입견의 좋은 씨앗이 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모두 개인의 입장에서 만나고 대화하고 서로를 알아간다. 그런데 어째서 나는 대표적인 동양인 혹은 전형적인 한국인이 되어야 하는 것일까. 무엇보다 동양인이 한국인이 중국인이 어느 관점에서 웃긴 것일까. 어느 관점에서 수군거리며 고개를 돌려 굳이 쳐다봐야 할 대상인 걸까. 왜 나는 언제든 만만한 대상이 되어야 하는 것일까.
나는 그 개인들 속에 들어간 선입견이 두렵다. 막연한 고정관념은 그들의 입을 통해 끝없이 재생산되고, 그 말들은 상처나 분노로 나를 자극한다.
이 분노와 상처는 가끔 누군가 강제로 만들어준 '우리'의 세계에서 토닥임을 받을 때도 있지만, 그 고정관념의 편에 서서 '네가 이러니까 걔들이 이러는 거야. 네가 조심해야지'라고 말하는 사람들을 만날 때도 있다. 그들의 주장에 따르자면 친근함의 표현으로 어떤 동양인이 지나가면 '니하오'를 외쳐주는 것이고, 그나마 동양인에 대한 관심이 있기 때문에 '동양인은 말이야..'로 표현한다고 했다. 그것은 고정관념에 대한 옹호다. 그리고 그 고정관념은 단순히 내가 아주 동양인 같지 않아도, 아주 유럽인 같아도(동양인과 유럽인에 가깝거나 멀어질 수 있다는 것이 무엇인지 어떻게 가능한 것인지, 혹은 그 기준이 있는지 여전히 알 수 없지만) 작용할 것이다. 그들은 결코 진짜 나를 알고 하는 말이 아니고, 진짜 내가 누구인지 관심이 없고, 앞으로도 관심이 없을 예정이기 때문이다.
나는 가끔 두려웠다. 그러나 지금은 자주 두렵다. 하나하나 설명하기에 벅찰 정도로 자주 나는 내가 동양인임을 타인의 선입견을 통해 확인했고, 억울하던 마음이 분노가 될 정도로 나는 질려버렸다. 국기를 떼어버리고 싶다. 내 눈에 보이지 않는 그 꼬리표를, 나는 알 수 없는 선입견의 책자를 모두 지워내고 싶다. 나는 어디서든 나로 살아가고 싶다. 이런 마음은 아마 한국에서 꼬리표를 달고 살아가는 어떤 사람들에게도 똑같을 것이다.
누군가를 국기로 혹은 지도로 덮어버린다면, 성별로 덮는다면, 취향으로 덮는다면 그 누군가에 대한 판단은 1초 남짓으로 간편하고 빨라질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덮혀진 채로 살기엔 내가 너무나 인간적이고, 또 나 또한 누군가를 그렇게 판단하기엔 너무나 비인간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