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의 속을 채우는 것은 무엇일까
1. 사진을 공부하고 업으로 삼을 때는 주기적으로 결과물을 내야 했다. 누군가에게 나는 늘 나의 사진을 보여줘야 했다. 결과물은 평가와 비판의 대상이 됐다. 내게는 그 피드백이 나와 내 사진을 바꾸는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러나 가끔은 피곤했다. 꾸준히 결과물을 내는 것이 피로했고, 무기력한 순간도 많았다. 그 순환고리를 벗어나고 싶었던 적도 있었다.
2. 그래서 울타리 바깥으로 처음 뚝 떨어졌을 때는 잘 몰랐다. 늘 하던 대로 셔터를 눌렀고, 늘 하던 대로 사진을 모았다. 종종 자유롭게 사진을 올리던 브런치 페이지와 SNS가 있어 더욱 몰랐을지도. 하지만 시간이 계속 흐르고, 외장하드에는 목적 없이, 맥락 없이 찍힌 낱장의 사진들이 쌓여만 갔다.
3. 그동안은 주제를 모아 브런치에 글을 썼다. 그리고 한동안 사진에 관한 글을 발행하지 않았다. 사실 발행되지 않은 완성된 원고들이 있지만 나는 새 페이지를 열어 새롭게 글을 쓴다. 문득 이 사진들을 이렇게 말해도 되는 것일까 하는 생각 때문이다. 작가의 서랍에 고이 놓인 이 사진들을 나는 목적이 상실됐다 생각한다. 그래서 오늘은 셔터를 누르는 순간의 목적에 대해 생각한다.
4. 학교에서 과제로 제출해야 했던 사진들은 교수의 입맛을 맞추는데 목적이 있었다. 아마 100장 중에 10장 정도는 내 습관대로 해왔겠지만 최종으로 선택되는 사진은 평가할 그들의 시선과 닮아 있었다. 손가락을 움직이는 순간은 '아, 지난번 수업 때 칭찬받았던 비슷한 구도다!'라는 생각이 스친다.
4.1 셔터가 움직이는 순간의 목적은 학점이다. 학점이라는 열쇠를 쥔 교수의 구도와 시선은 목적을 달성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다. 혹 셔터가 내 마음대로 움직였다 하더라도, 마우스 클릭 몇 번으로 나의 사진을 배제한다.
5. 잡지사에서 사진을 찍는 순간은 두 가지로 나뉠 수 있다. 첫째로 행사를 기록할 때, 두 번째는 제품의 특징이 드러나는 리뷰 기사를 준비할 때다. 기록용 사진은 기록에 충실해야 한다. 어떤 브랜드에서, 어떤 행사를, 어떤 특징으로 진행했는지. 그것이 잘 드러나는 순간 셔터를 누른다. 그 순간의 목적은 기사다. 기사라는 비가시적인 글을 가시적으로 가장 효과적으로 보여줄 수 있는 사진. 그 사진의 목적은 오직 거기에 있다.
5.1 리뷰 기사는 제법 어렵다. 한 기계의 기술적인 면을 사진으로 드러낼 때 사진 자체의 아름다움이 그 어떤 것보다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 사진은 그렇게 입을 모아 말해야 한다. '여러분, 이렇게 멋진 사진을 이 카메라로(이 렌즈로) 촬영했답니다'. 리뷰용 사진의 목적은 사진이 아니다. 사진을 만든 기계다. 해당 브랜드의 마케팅&홍보 부서에서는 그 사진들의 목적이 판매 증진일 것이다. 광고의 일부분으로서의 사진이기에 아무리 멋진 사진이라도 해당 카메라로 촬영되지 않았다면 의미가 없다.
6. 결혼 스냅사진은 내 앞에 선 이 두 사람을 주인공 삼아 이들을 가장 아름다운 모습으로 남겨야 한다. 어떤 카메라, 어떤 렌즈를 사용하든 중요한 것은 이 사람들이다. 그들이 담겨 있지 않은 사진이라도, 모두 그들과 관계가 있다. 그들과 관계없는 맥락의 사진이 여기에서 의미가 없는 이유는 단 하나다. 이 사진들의 목적이 그들의 기대감을 만족시키는 동시에, 한 개개인의 역사 한 페이지를 아름답게 장식해야 하기 때문이다.
7. 이 모든 울타리에서 벗어난 상태에서 촬영한 사진의 목적은 무엇일까. 어림잡아 계산을 하면 90% 정도의 사진은 기록이 목적이다. 그리고 나머지 10%는 목적이 없는 사진이다. 정확하게 말하면 왜 찍은 사진이냐고 물었을 때 '그냥'이라는 말 그 이상도 이하도 할 수 없는 것들. 무엇을 위함이냐라고 물었을 때도 확고한 대답을 할 수 없는 것들이다.
8. 나는 그 10%의 '그냥' 찍고 싶어 찍는 사진들의 목적을 굳이 생각했다. 쓸모를 가지지 않은 사진들의 쓸모를 생각하려 했던 것 같다. 의미를 담지 않았던 사진에 조작된 의미를 넣으려고 했었다. 보는 사람들은 쉽게 속을 수 있다. 그럴듯한 글과 말로 '~을 담고 있다'거나 '~을 생각하고 찍었다'라고 덧붙이면 그들에겐 그렇게 보일 사진이다. 그래서 브런치에 주제를 만들어 어울릴만한 사진을 모아봤다. 제법 그럴듯해 보였지만 텅 빈 공간에 채워 넣을 글이 모자랐다.
9. 겉은 보통의 사진과 같을지 몰라도 글을 쓰면 그 속이 텅 비었는지, 무엇으로 채워져 있는지 알 수 있다. 텅 빈 속을 채우기 위해 일반적으로 하는 두 가지 방법은 1. 그럴듯한 속을 만들어 채워 넣거나 2. 사진과 관계없는 말을 하는 것이다. 첫 번째의 경우가 작가의 서랍 속에 가만히 잠든 글과 사진이라면, 두 번째 경우는 SNS에서 많이 사용한다. 특히 이미지를 주요 기반으로 하는 인스타그램에 게시하기 위해선 어떤 사진이든 필요하다. 그래서 아무 사진이나 사용해 아무 글을 쓴다.
10. '껍데기만 있는 사진'이라고 하면 부정적으로 들릴지 모른다. 그러나 모든 사진은 껍데기가 될 수 있지 않을까. 기록용 사진이라도 그 기록이 더 이상 필요 없게 된다면 그것 역시 목적을 상실한 껍데기가 된다. 학점을 위해 열심히 촬영한 사진도 대학을 졸업한 나에겐 껍데기로 남았다. 해당 카메라가 단종된 리뷰 사진은 그냥 사진에 불과해졌고, 고객과의 상호관계가 끝난 스냅사진은 그냥 데이터가 됐다.
11. 애초에 사진은 껍데기 일지 모른다. 그 순간의 현실을 2차원으로 만드는. 그리고 이 기술은 삶의 다양한 부분에서 유용했다. 유용함은 곧 그 사진의 목적이었고, 카메라를 든 나는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달려왔지만 그 목적을 달성하는 것이 진짜 카메라를 든 목적이었는지는 생각해보지 않았다. 그리고 더 이상 달성한 목적이 없는 상태에서 카메라를 쥔 나는 이유 없이 셔터를 누른다.
12. 텅 빈 사진은 그저 텅 빈 것이다. 껍데기가 보여주는 이미지가 전부일뿐, 목적이 없기에 이미지 그 이상 혹은 이하의 판단을 할 수 없다. 이런 사진을 찍는 나의 목적을 찾자면 사진 자체이지 않을까. 선이 선 자체의 목적으로 움직이고, 아름다움이 아름다움 그 자체를 위함이듯 10%의 사진도 사진 자체이기 위한 동어반복적인..
13. 이 글에 사진이 필요한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사진을 넣을 생각이다. 이 사진들은 이 글을 수식하거나 보조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 글에서만큼은 사진과 글은 물과 기름 같은 사이다. 섞이지 않고, 오롯이 각자의 성질로 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