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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뒤셀도르퍼 Jan 17. 2018

밝은 방과 기억의 색

현실을 상상한 이미지

1. 낯선 도시를 여행하다가 멈춰 서서 카메라를 들고 사진을 찍는다는 건 생각보다 번잡스러운 일이다. 특히 유럽처럼 소매치기가 많은 곳은 장비에 대한 걱정도 있으니. 길을 찾다가 혹은 헤매다가 굳이 카메라를 꺼낼 때는 다 이유가 있다. 내심 기대하는 장면이 있어서다. 

2. 카메라로 사진을 찍어봤던 모두가 알겠지만 찍은 직후의 사진은 기대와 많이 멀어져 있는 경우가 많다. 밝기와 색상이 내가 보는 것과도 차이가 있지만, 내가 기대한 장면과도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그 격차를 줄여보고자 카메라의 설정을 바꿔보기도 했지만, 카메라 내에 있는 프리셋이 모든 상황을 커버해주진 못했다. 

3. 사진을 들고 밝은 방으로 들어갔던 것은 그 이유 때문이었다. 그저 그 격차를 줄이기 위해. 원하는 색으로 이리저리 보정을 하고 나면 제법 생경한 이미지가 태어난다. 어쩌면 나는 사진을 찍는 순간부터 아니면 사진을 찍기로 결심한 순간부터 마주하는 현실을 이미지로 상상할지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파인더 속 현실을 더 이상 현실로 간주하지 않고, 상상의 이미지와 색으로 끌어가려는 나의 의지를 발견한 것은 밝은 방 안에서였다. 

4. 밝은 부분은 끌어내리고, 어두운 부분은 끌어올린다. 색온도를 이리저리 바꿔보고, 특정 색을 강조하기도 하면서 내가 보고 싶었던 이미지를 만든다. '만들다'라는 말이 '보정하다'보다 잘 어울릴 것 같다. 카메라가 입력한 색도, 내 눈이 비춰준 현실도 이렇지는 않았으니까. 밝은 방은 기존의 이미지, 현실을 새롭게 만든다. 참조한 재탄생 같은. 

5. 이것은 기억의 색일 것이다. 그 순간을 상상했던 기억의 색. 혹은 그 순간을 경험했던 감정을 기억하는 색. 같은 도시의 이미지여도 사뭇 다르게 기억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닐까. 비 오는 날 저녁 이케아에서 저녁식사를 하고 돌아가는 감정과 해가 밝게 뜬 다음 날 바다를 마주한 감정이 다르듯. 

6. 사실 허접한 콤팩트 카메라의 사진을 마구 뒤트는 것은 퀄리티면에서 좋은 선택이 아니다. 내 눈은 단 한 번도 노이즈를 만든 적이 없지만, 기억의 색이 적용된 이미지는 가끔 오작동을 일으킨다. 그 이미지들은 단호하게 '사진'과 '나'라는 내적 동일성을 깨뜨린다. '내가 찍는 사진은 나의 시선이야'라고 뱉어버릴 기회를 빼앗는다. 

7. 결국 내가 본 것과 내가 상상한 것, 진짜 현실과 카메라 속 이미지, 보정된 이미지는 모두 각각 다른 모습으로 있을 뿐이다. 서로 가까워지거나 멀어지려고 노력하지만 영원히 좁힐 수 없는 그 간극은 어쩔 수 없는 것일지도. 그 어떤 것보다 색은 그렇다. 색은 작은 온도 변화만으로 분위기를 바꿔버리니까. 

8. 내가 본 것이라고, 내가 경험한 분위기라고 던진 이미지들 중 진짜로 내 눈이 본 현실은 없지 않을까. 그런 면에서 이번 글의 이미지를 정확하게 설명하면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상상했던 분위기 또는 기억하는 분위기를 표현하고 싶었던 이미지'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현실이 생각보다 달달하지 않아서 카메라를 드는 나는 자꾸만 상상의 현실을 만들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리고선 상상한 현실을 직접 경험한 것처럼 우기고 있을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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