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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뒤셀도르퍼 Feb 13. 2018

깊이를 잃은 평평함에 대해

콘트라스트와 블루&핑크

1. 바람은 칼 같았지만 해는 반짝이는 한국. 그곳에서의 사진들은 으레 아주 까만 것과 아주 하얀 것들이 대치하고 있었다. 강한 쉐도는 설명을 막는다. 생략으로 간단하게 만든다. 가끔 그것이 누구의 얼굴일지라도. 

2. 밝은 부분도 데이터가 사라질 정도로 밝을 때가 있다. 사진만으로도 눈이 부실만큼, 진짜 해를 마주하고 있다고 믿을 만큼. 아주 밝음 역시 생략을 전제로 한다. 내 눈은 그렇지 않지만 사진은 너무 밝거나 너무 어두웠을 때 그것을 데이터 없음으로 인지하곤 한다. 

3. 이 사진들을 평평하게 만들었다. 완전히 사라진 것들을 제외하고 살아있는 데이터를 중간으로 끌어모았다. 눈으로도 본 적 없는 한국의 풍경을 사진으로 본다. 서로 많은 것을 양보해 한 발자국씩 중간으로 온 풍경들. 

4. 어둠을 밝음으로 끌어온 데이터들은 미세하게 불협화음을 낸다. 색상 노이즈, 입자 노이즈. 평평하지만 거칠한 표면이 남는다. 거기에 색을 뒤집어 씌운다. 파란색, 옅은 붉은색. 

5. 깊이를 느낄 수 없는 바다는 붉은색을 띤 파랑이 된다. 어느 것도 제대로 된 화이트를 보여주지 않는 왜곡된 사진이 된다. 

6. 사진은 종이 표면이 되기 전에 이미지를 보여주는 데이터가 된다. 그것은 이렇게 평평해지기 전에도 그랬지만 색까지 뒤집어쓴 이후엔 더욱 확고해진다. 현실의 깊이감 대신 뇌의 망상이 작동해야 한다. 사실 사진을 보며 느끼는 감정들이 그런 것 아니었을까. 

7. 사진을 보는 것 따위는 아무런 경험이 아닐지 모른다. 그것이 어떤 뜨거운 감정을 일으킬지라도 개개인의 감정이고, 상상이다. 사진은 파편적인 정보를 가지고 있다. 그 정보를 접하는 누군가는 경험하고자 하는 욕구를 느낄 수 있다. 그러니까 그뿐. 

8. 전쟁에 관한 사진을 하루 종일 보고 나서 "난 전쟁을 경험했어. 정말 끔찍하고 잔인하지"라는 말은 어딘가 깊이감 없이 평평하다. 단조와 허풍을 넘나드는 평평한 사진으로 느낄 수 있는 감정은 깊이감이 없다. 

9. 그렇다고 이미지를 만드는 사람은 유일한 경험을 했던 것일까. 그도 그렇지 않을 수 있다. 칼바람 부는 바닷가에 서 있었지만 어딘가 모르게 나른한 저 바다에 손가락 하나 담그지 않았다. 나는 그저 평평한 이미지를 담기 위해 아주 잠시만을 그곳에 머물렀을 뿐. 

10. 납작하게 글 위아래에 붙어 있는 이 사진들은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다. 아무것도 전달하지 않는다. 그저 보는 내가 아련할 뿐이고, 바라보는 누군가가 저 바다를 꿈꿀 뿐이다. 경험은 과정과 시공간을 요구한다. 클릭 한 번, 한 페이지를 넘기는 손가락의 가벼운 수고로는 그 경험을 내 것으로 할 수 없다. 

11. 여행 사진이 실은 아무것도 아닌 것 같다고 말하고 싶었다. 누군가가 모아둔 여행 사진이라는 파편은 그저 경험한 사람이 전하고 싶은 무언가 정도. 심지어 파편만으로 이어지지 않는 감정을 어렴풋한 글로 꿰매는 형식인 것 같다. 

12. 그리고 그것은 내게도 마찬가지다.

13. 그래서 짧은 제주도 여행에 관한 사진을 모두 평평하게 만들었다. 그곳에서의 경험이라는 깊이감을 사진에 부여하고 싶지 않았다. 노이즈와 노이즈로 뒤덮인 이 사진들이 나른함을 준다면 그것은 온전히 당신의 감정이다. 나는 나른하지 않았다. 따뜻하거나 편하지도 않았다. 그것이 사진 밖의 진짜 경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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