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는 공포영화라고 부를 정도로 끔찍한 트라우마의 이야기일지도 모르는 로맨스 영화 '500일의 썸머'.
나는 개인적으로 영상미가 좋아서 좋아하는 영화 중 하나다. 빛바랜 필름 같은 영화의 분위기가 내용과는 달리 편안하게 만들어주는 그 부분에서 매력을 느낀다. 물론 내용도 따뜻했으면 좋았겠지만.
2018년 도쿄에 살고 있던 어느 날. 나는 즐겨보던 한국인 여성의 블로그에서 시부야의 맛집을 소개하는 글을 보게 되었다. 맛집이라고 하기엔 앙버터 사진 하나만 올라가져 있었다. 하지만 글에서는 이 비스트로의 분위기와 친절한 점원들의 태도를 칭찬하며 두 번 더 오고 싶다는 내용이 있었다. 나는 그때 할 일도 별로 없고, 저 멀리 있는 아사쿠사나 아키하바라도 아닌 시부야에 위치해 있다는 글을 보고서는 왜인지 오늘 밤 그곳에 가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대충 읽을 책을 챙기고 저녁에 비스트로에 혼자 찾아갔다. 시부야역에서 내려서 붐비는 사람들 틈을 지나 골목길을 꺾고 꺾다 보면, 어둡지만 화려한 가게들이 즐비해있는 골목이 나온다. 그리고 여러 사람을 마주하게 된다. 가게 앞치마를 입고 나와서 서서 담배 피우고 있는 사람, 자전거를 끌고 언덕을 올라가는 사람, 치렁치렁한 액세서리를 멋있게 걸치고 친구들과 이야기하며 내려오는 사람들까지.
내가 출발한 시각은 5시 정도였지만, 도착해 보니 어느덧 노을이 지고 추운 밤공기가 불어왔다. 처음에는 구글 맵이 밝게 보이지 않았는데, 해가 지고 주변이 어두워지면서 점점 내 핸드폰의 밝기와 주변의 어두움의 대비가 커져갔다. 그러다 허름한 건물 앞에 서서, '어, 블로그에서 봤던 외관이다.'하고 작은 걸음으로 그 앞까지 걸어갔다. 그러다 문을 열려고 한 순간, 점원이 우연히 나왔다.
그때 당시에 나는 예약할 생각도 못했고, 혼자 갔기 때문에 어떻게든 자리가 있겠지-라는 짧은 생각을 했으나, 물어보니 그 둘 중 어느 것도 문제가 아닌, 앙버터 빵은 아침에만 판다는 소식을 들어버렸다. 정보는 알아보고 갔으면 좋았을 텐데, 아쉬운 마음에 내일 다시 아침에 오겠다고 점원분께 인사를 드리고 다시 역으로 풀이 죽은 채로 돌아갔다.
다음날 아침, 같은 룸메이트인 친구들이 아침부터 어디를 그렇게 가냐고 물어보는 목소리를 뒤로 하고 시부야로 걸음을 옮겼다. '그 앙버터가 대체 뭐길래...' 속으로 조금은 스스로를 이해하지 못하며 이번에는 맵 없이 휘적휘적 걸어 가게를 찾아갔다. 당연히 어젯밤에 갔으니 기억이 안 날 리가 있나. 아침에 보니까 가게는 또 다른 느낌이었다. 목재 문을 조심스럽게 열고 내가 첫 손님일까 주위를 살펴봤지만 역시 벌써 2팀이나 자리하고 있었다. 나는 안쪽 자리로 이동했다. 그리고는 점원에게 앙버터와 커피를 주문하고, 가지고 온 소설책을 읽기 시작했다.
앙버터가 드디어 나왔다. 한 입을 먹는 순간, 이때까지 먹은 앙버터 중에서 제일 맛있다는 생각을 했다. 혹시 첫끼여서? 아니면 이 공간이 주는 편안함 때문에? 아니면 내가 어제 헛걸음하고 돌아갔다가 다시 먹으러 온 앙버터라는 생각 때문에? 무엇이 정답인지는 몰랐다. 하지만 글을 쓰고 있는 몇 년 뒤 지금 내 머릿속에서도 여전히 그때 먹은 앙버터는 맛있었다는 기억이 남아있다.
혼자 돌아다니면 항상 노래를 듣던 나는 그때 당시에도 귀에 이어폰을 꽂고 있었다. 그러다가 점원이 무엇을 물어봐서 이어폰을 잠깐 뺐는데, 그때 귀에 익숙한 멜로디가 들렸다. 노래를 다 들어본 적 없는 멜로디인데, 왜 이렇게 익숙하지... 생각할 때쯤 "To die by your side, it's just a heavenly way to die..." 가사가 흘러나왔다. 500일의 썸머에서 썸머가 톰에게 엘리베이터에서 불렀던 노래였다.
그 당시, 그리고 지금도 500일의 썸머의 영화 분위기나 ost를 좋아한다. 그래서 그런지 책을 읽다 우연히 듣게 된 이 영화의 ost는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언제 한번 '사람들은 어떤 여행을 사랑할까?' 고민한 적이 있었다. 모든 기술이 각자의 귀찮음을 해결해 주는 계획형 서비스가 도움이 되지 않을지 생각하던 참에, 여러 명을 인터뷰하고 깨달은 것은 사람들은 여행에서 마주하는 우연(serendipity)을 가장 사랑한다는 것이었다. 자신이 세운 계획이 완벽하게 지켜지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그럼에도 내가 예상하지 못한 부분에서 우연히 만나는 즐거움을 기대한다는 것이다. 나에게는 그때 당시의 이 비스트로에서의 경험이 그러했다. 아직 그 뒤로 다시 방문한 적은 없지만, 언젠가 다시 간다면 그때도 앙버터를 다시 먹어보고 싶다는 생각을 가끔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