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네상스 미술을 주도한 화가
알브레히트 뒤러(Albrecht Dürer, 1471~1528)는 남부 독일 뉘른베르크에서 금세공 업자의 아들로 태어났다. 뒤러는 처음에 부친의 지도 아래서 금세공 기술을 배웠으나 화가가 되기 위하여 미하엘 볼게무트의 문하생이 되었다.
뒤러는 1490부터 1494년까지 각지를 여행하며 안목을 넓힌 후에 다시 뉘른베르그로 돌아와 아그네스 프라어와 결혼하였다. 그러나 그는 결혼한 지 3개월 만에 신혼인 아내를 남겨두고 이탈리아 베네치아로 여행을 떠났으며 이듬해인 1495년 귀국하였다. 이 시기의 뒤러의 이탈리아 방문은 뒤러에게 당시의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회화를 가까이하게 된 계기가 되었으며, 이 일은 뒤러 자신뿐만 아니라 독일 회화 전체를 위해서도 커다란 의의를 갖는 일이었다.
뒤러가 이탈리아 여행 중 그린 수채화는 타국의 자연 풍광에 대한 감동이 싱싱한 서정성과 날카로운 관조를 바탕으로 훌륭하게 표현되어 있으며 이후 유럽 풍경화 발전에 많은 영향을 준다. 그 후 뒤러의 이름은 매우 유명해졌다.
사실상 그의 명성이 가장 잘 알려지게 만든 것은 그의 판화 연작이었다.
특히 1498년에 간행한 목판 연작 ‘요한계시록’은 유럽 최초의 기념비적인 작품이 되었다. 판화집, ‘요한계시록’에 수록된 각 작품마다 고도한 기술적 완성과 탁월한 화면 구성을 보여주고 있다.
요한계시록에 이어 발표한 2점의 자화상은 극도의 사실성과 깊은 정신 내면이 하나로 융합된 명작이다. 많은 미술가들이 뒤러가 화가 자신의 내면을 투영한 ‘자화상’이라는 작품형태를 미술 역사상 처음으로 발표한 화가라는데 동의한다.
1505년부터 1507년까지 2년에 걸친 뒤러의 두 번째 이탈리아 여행에서 그는 이탈리아 미술의 합리성과 명쾌한 공간 구성, 또는 형태 감각에 크게 영향을 받게 된다. 이 무렵부터 뒤러는 동판화도 시도하였는데 특히 1513년부터 1514년 사이에 제작된 <기사의 죽음과 악마>, <서재의 성 히에로니무스>는 걸작으로 손꼽힌다.
1520-1521년에는 처음으로 아내를 동반하여 네덜란드를 여행하였으며 이 시기에는 초상화의 걸작을 많이 남겼다. 1526년 <네 사도>를 완성한 뒤러는 이후 비례론 등 이론서를 집필했고, 2년 후인 1528년 고향 뉘른베르크에서 숨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