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라이언트 멱살잡고 캐리하기
몇 년전, 웹상에서 광고 직종별 이행시가 유행했었고, ‘AE’의 이행시는 이랬다.
A : A ㅏ...이것도 제가 하나요?
E : e ㅔ... 이것도 제가 하나요?
짤을 보자마자 박수치며 공감했다. 역시 광고인의 통찰력은 무섭다. 대한민국 모든 AE가 공감했으리라 의심치 않는다. 업계에서는 많이들 AE라는 직종을 ‘광고회사의 꽃'이라 표현한다. 꽃이긴 꽃이다. 다만 ‘한 철도 못가 시들고 떨어져 버릴 수 있고, 영영 필 수도 없는 꽃이다’라는 전제를 인정해준다면.
광고회사 기획자는 ‘전천후 멀티플레이어'여야 한다. 클라이언트의 요구사항을 시작부터 끝까지 책임져야 하기에. ‘저는 멀티를 못하는데요...’ 걱정할 필요 없다. 알아서 멀티로 만들어주니까. 어디서들 이렇게 모였는지 충분히 그럴 능력의 사람들이 즐비한 곳이 광고회사다. 기획은 기본소양에 가끔은 카피까지 쓰고, 매체사가 주는 숫자로 가득한 리포트의 효율을 분석한다. 캠페인 견적을 짜고, 결과 리포트를 만들어 보고한다. 클라이언트에 청구하는 비용 모두를 AE가 책임진다. 그래서 꼼꼼하고 차분한 성격이나 능력을 가지고 있다면 좋다. 제너럴리스트에 가까운 직종이라 말할 수 있으나, 상황에 맞게 스페셜리스트로 변해야 할 때도 많다. 통찰력 가득하게 한 줄로 정리하는 카피를 쓸 때나, 클라이언트 앞에서 프레젠테이션을 할 때나, 디자인 감각이 좋아 뛰어난 안목을 가지고 있거나, 현장 프로모션에서 업무를 할 때나. 글을 잘 쓰거나, 말을 잘하거나, 감각이 좋거나, 다양한 경험치를 가지고 있거나. 플러스 알파가 되는 각자만의 무기를 가지고, 그 칼날을 계속 갈면서 커리어를 이어간다.
입사 첫날, 미팅에 참여했던 F&B 브랜드는 ‘SNS 운영'에 대한 고민이 컸다. 몇 년 동안 지속적인 컨셉을 유지했고 당연히 소비자에겐 피로감이 컸을 것이다. 브랜드에 이사님이 새로 부임하면서 변화의 열풍 같은 것이 불었는지, 가장 먼저 인스타그램 위주의 ‘SNS 운영’에 변화를 주고자 했다. 새로운 제품이나, 시즌 음료, 여름 겨울 이벤트 때마다 판박이처럼 올라오는 전자제품 카탈로그 같은 피드를 바꾸자고 제안했다. 라이프 스타일과 결합한 색 다른 전개를 펼치자 했고, 그것을 브랜드 아이덴티티로 밀고 나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바꾸고 싶었지만 어떻게 해야 될지 갈피를 잡지 못하는 클라이언트는 흔쾌히 제안을 받아들였다.
기존 디자이너들이 제작해 업로드하던 이미지에서 탈피, 제품에 컨셉을 입히고 직접 촬영하여 컨텐츠를 만들었다. 포토그래퍼를 구하고 미술팀을 섭외하여 로케이션을 찾아가기도, 스튜디오를 꾸며 촬영하기도 했다. 비용은 더 많이 투입됐을지 모르지만, 컨셉추얼 한 피드가 채워지자 고객의 반응은 댓글에 직접적으로 나타났다. 고객들이 찍은 사진에 리워드를 주고 그 이미지를 한 달에 한번 공식 계정에 올렸다. 자신들이 찍은 사진이 공식 계정에 올라오니 고객은 좋고, 브랜드는 미미하더라도 소통한다는 것에 의미를 둔 이벤트도 꾸준히 진행했다.
정성 들여 만든 이미지와 영상에는 기획했던 컨셉과 결과물이 돋보일 수 있도록 시의적절한 피드 문구를 덧붙였다. 하나의 컨텐츠 업로드에 3가지 피드 문구 후보를 기작성하고 추천하는 의견을 담아 보내면, 담당자가 최종 확인해 준 문구로 릴리즈 했다. 글쓰기를 좋아하고 카피라이터도 하고 싶었던 나라서 문구 작성에는 어려움이 없었다. 이미 기획단부터 확실한 컨셉을 가져가며 그것을 쉽게 풀어 써주기만 하면 되었으니까.
1년 동안 끌고 나가야 하는 SNS 운영의 시작이 좋았다. 기존 브랜드가 가지고 있던 이미지와 우리가 제안한 컨셉,특화된 컨텐츠에 감성적인 피드 문구 세 박자가 조화롭게 맞아떨어졌다. 컨텐츠도 컨텐츠거니와 감성적이고 따뜻하게 풀어낸 메시지는 특히 대표가 매우 만족해했다. 우리 중 그런 느낌의 문구를 쓸 수 있는 사람은 나 밖에 없다며, 브랜드에서 매우 만족해한다고 칭찬으로 나를 고래로 만들었다.
몇 번은 직원들이 하나씩 문구를 작성해 보낸 본 적이 있었다. 머리를 짜내 보낸 세 가지 문구 중 담당자는 어떻게 알아보는지 내가 작성한 문구를 귀신같이 선택했다. 초반 마음에 드는 문구가 없다며 아쉬워하던 그는 시간이 갈수록 나와 마음이 맞아갔다. PM이 아니라 ‘우리 브랜드다' 생각하며 일한 마인드셋이 빛나는 순간이었다.
한 달 8-10개 정도 되는 업로드 스케줄을 미리 짜고, 컨셉을 제안하고, 컨텐츠를 제작하고, 피드 글을 작성하고, 광고 집행을 하고. 고작 SNS 운영에도 이렇게나 손이 많이 갔다. 신경 쓸게 많은 프로젝트였지만, 고객의 좋은 반응을 즉각 알 수 있고, 담당자가 큰 이견없이 솔루션에 동의해주고 만족해 준 좋은 프로젝트로 회고한다. 한 해, 연말 마케팅 활동을 결산하는 자리에서 ‘처음으로 마케팅 투자 비용에 따른 매출이 각 월마다 일정하게 따라와 주었다’는 이사님의 한 마디에 나의 고생은 매우 뜻깊은 보람으로 치환되었다. 그 해 연말은 몸은 추웠어도 일의 의미를 수십 번 맛있게 곱씹었던, 마음은 따뜻한 연말로 아직 기억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