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교육과 칭찬의 힘'
초, 중, 고 학생 시절 큰 상을 받아본 기억은 없다. 아침조례 때, 단상 위에 올라가 상을 받는 것을 보고 부러워 하긴 했었다. 그런데 어쩌나, 저길 올라갈 방법이 없는 것을. 성실하면 받는 ‘개근상' 조차도 없었고, 성적과 관련된 상은 더더욱 없었다. 매 학기말 받던 성적통지서를 받아든 부모님은 일찍이 큰 기대가 없었던 것 같다. 오직 내가 좋아하는 과목이었던 사회, 체육, 국어 점수만 잘 받고 수학, 과학은 중1 때부터 내려놓았으니까. ‘어떤 문제의 답'이 왜 하나 밖에 될 수 없는지 그때도, 지금도 이해할 수가 없다. ‘1+1=∞’라고 생각하는 전형적인 문과생에 인문학도가 틀림없다.
다리가 겨우 들어갈 정도로 바지통을 줄이고 다니던 중학교 때, 교내 백일장이 종종 열렸다. 삼일절, 식목일, 한글날같이 의미 가득한 공휴일을 맞아 진행하던 백일장으로 당시 어떤 주제였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나눠주는 종이에 반과 번호, 이름을 쓰고 한 시간가량 나름 머리를 굴려 빽빽하게 써 냈던 것 같다. 몇 주가 지났을까. 백일장에서 교내 최우수상을 받았다고 국어선생님이 말해주었고, 내가 쓴 글을 수업 시간에 가져와 반 학우들 모두에게 돌려 읽게 했다. 친구들에게 글을 공개한다는 것은 조금 부끄러운 일이었지만, 시간과 노력을 들여 쓴 글의 영향력을 알게 되었고, 생각의 얼게를 짜고 전하고자 하는 의미를 구성한다는 것의 보람됨과 가치를 처음으로 몸소 체득했다. 선생님은 그 뒤 간략한 코멘트를 덧붙였다. ‘글의 짜임새가 좋아 이해가 쉽고, 근거와 주장이 타당하며, 말하고자 하는 바가 명확하다’ 지금도 유념하는 글쓰기의 기초를 그때도 그렇게 말해주었다.
글에서 아직 기억나는 표현이 있다. ‘무언가 풍족하고 풍성한 환경을 조성해야 한다'라는 것을 말하기 위해 황금이 있는 땅으로 표현되는 ‘엘도라도를 찾아야 한다'라고 비유했다. 그 당시 엘도라도를 어떻게 알게 되었을까. 즐겨 읽던 역사 책이나 과학 책에서 본 내용이 순간 스쳐 지나갔으리라. 반에서 성적으로 1등을 하는 친구가 다가와 글을 잘 쓰는 방법이 무엇인지 물었고, 어깨가 잔뜩 올라간 채로 말 같지도 않은 말을 했으리라.
국어선생님은 종종 수업이 끝나면 도서실로 나를 불러 중학생이 읽기 좋은 여러 권의 책을 추천해 주었다. 선생님의 눈에 글에 소질 있는 학생이 자주 밟혔나 보다. 중국 작가 위화의 ‘허삼관 매혈기'도 선생님 덕분에 읽게 된 작품이다. 독파하는 데 채 며칠이 걸리지 않았고 탄탄한 전개, 빠져들 수밖에 없는 인물과 스토리가 인상적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한국 문학도 모르던 내게 중국에도 이런 멋진 이야기를 만드는 작가가 있음을 선생님 덕에 알았다. 그 뒤로 중국을 넘어 아시아, 유럽, 미주 전 세계의 유명 작가들에 대한 관심이 크게 늘었음은 당연하다.
당시 국어선생님은 입시교육이 만연한 환경에서 시험에 나올만한 정답만을 알려주는 교사가 아닌 인성을 강조하고, 사람 됨됨이를 가르친 분으로 기억한다. 성적으로 학생들을 줄 세우지 않았고, 매를 들지도 않았지만 그의 말은 언제나 경각심을 깨우치는 영혼 가득한 사랑이었다. 교과서에 나온 작품 이외에도 소설과 시를 가지고 학생들 각자의 느낌과 해석을 존중해 주었던, 진정으로 문학을 사랑하고 그 가치를 학생들에게 온전히 전달하고자 했던, 참 스승이었다. 선생이 아닌 스승.
내 열 손가락을 다 채우지 못한 스승 중의 한 사람으로 기억되는 선생님. 벌써 20년 이 지난 지금, 아직까지 교편을 잡고 계신지는 모르겠으나 학창 시절 그런 분을 만났던 것도 내게 큰 선물이라 생각된다. 그때는 미처 알지 못했던, 지나보니 알게 되는 것들은 내 마음의 서랍 한 켠에서 생각, 감정을 온전하게 지키고 있었다. 그 서랍을 이제야 열어본다. 더불어, 가치를 매길 수 없는 이 선물을 갚아드리고 싶다. 마음속으로 자주 선생님께 안부를 전한다. ‘감사했습니다. 선생님, 스승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