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도 없는 장비병이 찾아오다 (1)

by 분더카머

cover 공링후이(중국)

1975년생

전형 : 오른손 셰이크핸드 올라운더

2000년 시드니 올림픽 남자 단식, 복식 금메달

2004년 아테네 올림픽 남자 복식 금메달

1995년 텐진 세계선수권 남자 단식 금메달

1995년 님 월드컵 단식 금메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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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격 탁구 성장기

47구


탁구 라켓 손잡이에 손 때가 묻어난다. 공을 쳐댈수록 러버의 끝이 닳고 테이블에 찍으면서 라켓 목판에 자국이 남는다. 너덜너덜한 러버와 오래된 라켓은 고수의 상징. 어느덧 새 라켓의 모양은 온데간데없고 열심히 친 만큼 에이징을 고스란히 받고 있는 라켓을 들여다본다. ‘운동은 장비빨’이라고 생활체육에서 장비의 중요함은 무시하기 힘들다. 탁구에선 좋은 장비가 부수를 올려준다는 말도 있는데, 저렴한 라켓으로도 강한 볼을 쳐대는 선출 코치들을 보면 장비는 무관하다고도 느낀다. 장비에 대한 욕심을 많이 누르고 있었는데, 어느 순간 그 족쇄가 한 번에 풀려버렸다.

라켓을 바꿔볼까 하는 생각은 단순한 고통에서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어느 날부터인지 모르게 손바닥 아랫부분, 라켓 끝이 닿는 부분이 아파오기 시작했다. 라켓 운동을 처음 해봐서일까, 손에 무리하게 힘을 주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엄지와 검지의 힘으로 라켓 몸통 쪽을 더 잡아줘야 하는데 그게 허술하니 잡기 쉬운 손잡이에 온 힘을 가했을 수도. 라켓에 힘을 주고 돌려야 공에 강한 회전을 줄 수 있다고 착각하고 있었고, 그게 아니란 걸 알면서도 포핸드에서 힘을 빼지 못하는 게 지금 내 수준이기도 하다. 힘보다는 속도라는 것에 이제 서서히 눈을 뜨고 있다.


fl과 st 그립의 차이. 안정감과 전환이 주는 차이가 크다. (출처-버터플라이)

손이 아파지면서 그립을 쥐면 가려질 정도로 손이 큰 내게 지금 쓰고 있는 FL 그립은 맞지 않는 건가? 하는 의문이 들었다. 처음 라켓을 살 때 FL, ST 그립에 대한 고민이 있었는데 보통 손이 작은 남성이나, 여성들은 아랫부분이 치마처럼 곡선 모양의 FL을, 손이 큰 사람은 직선으로 떨어지는 ST 그립을 선호한다는 평이 많다. 미세하지만 FL 그립의 닿는 면적이 ST 그립보다 넓기도 하다. 국내에서만 그립에 대해 이분법적으로 나눈다는 평도 있고, 중국 dhs 사는 st 그립이 애초에 출시되지 않기도 한다. 일반적으로 생활체육에서 사용하는 빈도를 보면 FL 그립이 90%, ST 그립은 10% 비율 정도이지 않을까 생각한다. 다만 그립은 사람마다 손 크기와 모양이 모두 다르니 정답은 없는 부분이며, 용품점을 찾아가 하나씩 잡아보면서 라켓 그립의 특징과 손에 맞는 핏한 느낌을 찾아가면 된다.

한 계절이 지나도록 탁구를 배우지만 한순간 일종의 벽에 부딪힌, 실력이 정체된 감정이 느껴졌다. 드디어 나에게도 온 탁구 권태기, ‘탁태기’ 초기 증상이다. 친한 회원들에게 ‘요즘 슬럼프고, 탁구가 잘 안 된다’ 푸념하니 옆에서 듣던 관장님이 ‘슬럼프가 오기엔 탁구 친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요?’라는 카운터를 맞았다.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하긴 4개월 차에 슬럼프는 무슨, 단지 기대가 큰데 비해 실력이 따라주지 못할 뿐. 우상향 하는 그래프를 그려가기보다, 지난한 과정의 수평선을 거치다 겨우 한 계단 오르듯 실력이 느는 것이 탁구라는 것은 아는데, 아는 것과 겪는 것은 또 달라서 고비가 자주 찾아온다. 적절한 대체 방법을 찾지 못하기도 하고.

의욕 가득 시간과 에너지를 힘껏 쏟는데도, 주 6일 빠지지 않고 탁구를 치는데도, 줄넘기와 스윙 연습을 병행하는데도 지지부진한 내 실력을 보면서 설명하지 못할 감정이 서서히 차올라 터지기 직전이었다. 머리는 꽉 막혔고, 몸은 무거웠고, 라켓을 쥐면 손에 힘이 풀리는 듯한 감각이 나를 지배했다. 정신에 육체가 지배당하는 순간, 변화를 줘야 한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고, 그때 바로 라켓이 생각났다. 기분 전환엔 쇼핑만 한 게 또 어딨으랴, ‘새로운 장비로, 새 마음 새 뜻으로’ 물질주의적이고 구차한 아이디어가 머리를 스쳤다. 테니스나 골프를 치다 엘보가 오면 운동을 쉬어야 하듯, 손바닥이 아프면 라켓을 내려놓아야 함에도 아이러니하게 다른 라켓을 찾아보는 나를 보면서, 그저 멀쩡한 라켓을 바꾸기 위해 합리적인 핑계를 찾는다는 것을 깨닫고, 내가 왜 이러는지 이유를 알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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