휘발된 '쓸모 있음'
빈손으로 보냈다.
휘발된 ‘쓸모 있음’
“같은 업무의 반복이에요. 해볼 수 있는 건 다 해본 것 같아요. 배우는 게 없어서 이직을 해볼까 해요. 나이도 있고요. 친구들도 이직해서 연봉 올리고 그랬더라고요.”
5년 차 마케터는 하소연처럼 말을 시작했다.
(워어어.)
화면 너머로 그의 안경알이 뿌옇게 보였다. 목과 반팔 소매 끝이 늘어진 검은 셔츠를 입고 있었고, 긴장감 없이 배를 내민 채 비스듬히 등받이에 기대어 앉아 있었다.
“고민이 많으신 것 같아요. 어떤 주제부터 얘기하고 싶으세요?”
그는 고작 대여섯 문장을 말했지만, 그 안에 담긴 어젠다는 열 개가 넘었다.
원만한 세션 운영을 위해 코치라면 정리해 주고 주관식으로 물어도 된다.
하지만 오늘 나는 어떻게 해야 할지 머뭇거렸다. 다음 질문으로 잇지 못했다.
(이 머뭇거림, 뭐냐?)
물 한 모금을 머금고 정신을 끌어당겼다. 머뭇거림과 정신을 끌어당기는 순간에도 그는 그저 늘어져 앉아 있었다.
“먼저 얘기하고 싶은 주제를 고르기 어려우신가요?”
“그러게요. 뭐부터 얘기하지…?”
“‘해본 건 다 해본 것 같다’는 부분에 대해 먼저 얘기해 볼까요?
아니면 이직 준비에 대해 얘기해보고 싶으세요?”
“아… 제가요. 졸업할 때 원래 가고 싶은 회사가 있었는데, 자격증 시험에 떨어져서 서류도 못 냈어요. 그러다가 우연히 지금 회사에 입사하게 됐어요. 그냥 뭐 할 만해서 계속 다니고 있는데, 제가 해볼 수 있는 일은 다 해본 것 같아요. 그래서 이직해서 연봉이라도 올려보려고요. 이직하는 게 맞겠죠?”
“본인은 이직이 맞다고 생각하세요? 이직의 이유가 ‘해볼 건 다 해봐서’인가요? 그리고 이직하면 연봉을 올릴 수 있다고 생각하시나요?”
말이 안 되는 흐름을 정리하려니 내 얼굴이 굳어졌다. 괜히 물을 한 모금 더 넘겼다.
“이직하는 게 맞겠죠, 코치님?”
“저의 동의가 있으면 이직이 가능한 건가요? 아니면 다른 걸림돌이 있나요?”
(내 얼굴이 더 굳어지고 있다…)
“아니, 코치님 동의가 필요한 건 아니죠… 이 회사에서는 더 배울 게 없어요.”
“네, 회사에서 무엇을 더 배우고 싶으신데요?”
(이… 앙… 물…)
“승진도 안 시켜주고…”
(읔.)
“흠… 잠시만요. 몇 가지 짚고 넘어갈 게 있어요. 제 말에 오류가 있으면 말씀해 주세요. 제가 드린 질문에 대한 답이 아니라, 본인이 떠올리는 생각을 말하고 있어요. 질문이 기억나세요?”
그는 답하지 못했다.
건강상의 이유가 있거나 드라마틱한 사건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학습이 느리거나 언어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도 아니었다.
상사가 강제로 세션 참여를 시킨 것도 아니었다.
특별하고 특정한 상황이 있는 게 아니었다.
그의 동문서답은 소리 없이, 요란하게 나를 자극했다.
와아아아…
내가 다양한 기준을 인지하지 못했던시절이였다면, 그를 추궁하고 몰아세워서라도 뭔가 챙겨가게 했을 것이다.
하지만, 빈손으로 그를 보냈다.
‘질문이 무엇이었는지 기억 못 할 수 있지’
(아니, 아니다!)
‘질문의 의도를 이해 못 했을 수 있지’
(아니, 아니다!)
나 자신을 최대치로 기만하며 ‘빈손’으로 세션을 마무리했다.
***
그가 아직 정확한 목적이나 이유를 몰라 답답해서 자극된 건 아니다.
그의 태도나 사고의 속도가 느려서도 아니다.
그의 업무 지식이나 성과 기준에 대한 실망도 아니다.
서로 공유하는 이 시간의 쓰임새가 너무 낮아 아까웠다.
맥락 없는 말을 듣느라 소요된 내 수고가 아까웠다.
그 아까움을 수습하는 내가 아까웠다.
모든 것이 목적이 선명하고 쓸모 있을 수는 없다.
하지만,
통제 불가한 상황에서 쓸모가 휘발되었을 때,
나는 자극받고 분노한다.
아. 못 산다.
오늘은 제가 응원이 필요한 날입니다...
워. 워. 워.
사람과 문제 사이, “낀 자”의 시선에서 바라본 이야기 속에서
“생각 리터치”로 조금 다른 각도로 사고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지난 20여 년 동안 크리에이티브 영역에서
울고 웃으며 달려왔습니다.
지금은 프로 코치로서, 생각의 결을 다듬고 있습니다.
글과 그림으로 더 많은 “낀 자”에게 닿기를 소원합니다.
생각이 잠시 머무는 곳,
오코치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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