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간 속에 갇힌 사람

뿌연 안갯속에서 당신의 목소리만 들렸어요

by 몽상가 J
“고통을 견디는 법은 한 가지밖에 없어. 그저 견디는 거야. 단, 지금 아무리 괴로워죽을 것 같아도 언젠가 이 모든 게 지나가고 다시 내 마음이 편안해지는 순간이 오리라는 믿음. 그거만 저버리지 않으면 돼. 어쩌면 그게 사랑보다 더 중요할지도 몰라.”

- 이석원 <실내인간> 中 -


드라마에서 가끔 그런 장면이 나온다. 주인공이 어떤 생각에 깊이 몰두하게 되면 그 사람을 뺀 나머지 공간이 뿌옇게 변하고, 주변의 소음마저 들리지 않는다. 멍하게 혼자만의 세계에 갇혀있던 주인공의 정적을 깨는 건 언제나 수다스러운 조연배우의 몫이다. 어깨를 툭툭 치며 "내 말 듣고 있어?"라고 물으면 주인공은 "어?.. 어."라고 대답하며 현실로 돌아온다. 참 익숙한 장면이지만 현실적이지 않다고 생각했다. 어떻게 수많은 사람들 속에서 나 홀로 갇힌 기분을 느낄 수 있지?


K를 알게 되고 조금씩 가까워지던 그 해의 가을. 내 생일은 어김없이 다가오고 있었다. 생일이라는 특별함이 더해진 그날만큼은 K와 보내고 싶었지만 딱히 만날 구실을 만들지 못한 나는 친구를 불러냈다. 서점에서 책을 선물 받고 소소한 이야기를 나누며 신호등을 기다리고 있을 때 전화벨이 울렸다. K를 지칭하는 문구가 액정을 반짝였다.


"햇살이 따스하게 내리던 그 날- 온통 푸른빛은 더해가고- 여린 하늘아래 아름다운 그대- 세상의 빛과 만났죠.

언제나 축복이 곁에 있어주길- 변함없는 모습으로- 영원히 사랑이 그댈 감싸주길- 생일 축하해요 그대."


'여보세요'라는 내 목소리가 수화기를 통해 전달되기도 전에 K의 노랫말이 내 귓가를 속삭였다. 이소라의 수많은 노래를 즐겨듣고 좋아했지만 이 노래는 낯설고 간지러웠다. 그보다 더 낯설었던 건 K의 목소리. 수없이 많은 대화를 나누었던 K가 노래를 부를 때는 이런 목소리구나, 하고 생각했다. 그 순간 나는 드라마 속 주인공처럼 K의 목소리와 함께 낯선 공간에 갇혀 버렸다. 시끌벅적한 종로의 거리 한복판에서 곁에 누가 있고, 내 앞에 어떤 장애물이 있는지, 어느 방향으로 바람이 부는지... 알 수 없었다. 수다스러운 친구가 '파란불!'을 외치며 내 손을 끌지 않았더라면 나는 한참을 그 자리에서 움직일 생각조차 하지 못했겠지.


"생일 축하해."

"노래 불러주세요. 이소라의 '생일 축하해요' 듣고 싶어요."


K와 헤어진 뒤, 나는 한참을 힘들어했다. 그렇게 몇 년의 시간을 흘려보내고 다시 찾아온 어느 가을의 생일날, K는 마치 어제까지도 연락을 하고 지내던 사람처럼 내게 문자를 보내왔다. 생일 축하한다고. 1초의 망설임도 없이 나는 가슴을 쓸어내리며 대답했다. 노래를 불러달라고.






몇 해를 까만 밤처럼 지내던 나는 당신이라는 존재를 잊은 적이 단 한 번도 없었어요. 당신과 웃으며 다시 마주하게 된다면 이번에는 절대로 당신을 힘들게 하지 않을 거라고 기도했거든요.


그날 당신이 보내온 문자 때문에 내가 얼마나 곤혹스러웠는지 알아요? 내 생일을 축하해주기 위해 모인 친구들 앞에서 눈물이 왈칵 쏟아질까 봐 몇 번이나 눈을 깜박였는지 몰라요. 그동안 받았던 그 어떤 선물보다 당신의 그 문자 메시지 하나가 얼마나 나를 행복하게 했는지 당신은 모를 거예요. 당신을 미워하고, 증오했던 감정이 한순간에 녹아내릴 정도로 기쁘고 행복했어요. 나를 아프게 했던 사람이라는 사실조차 다 잊어버릴 만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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