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보러 가자

속눈썹의 개수를 알고 있다는 것

by 몽상가 J
당신 생각을 많이 해요.
아침에도, 낮에도, 저녁에도, 밤에도, 그리고 그사이와 그 바로 전, 바로 후에도.
from. 레오.

- 다니엘 글라타우어 <새벽 세시, 바람이 부나요?> 中


나와 K의 집은 대중교통으로 1시간 이상 걸리는 곳에 위치해 있었다. 가끔은 서로의 집 근처에서 만나 데이트를 즐기기도 했지만 대부분은 둘만의 아지트에서 끝도 없는 이야기와 애정행각을 벌이다 막차를 타고 귀가하는 패턴이었다. 마치 입영열차에 오르는 사람처럼 발걸음은 쉬이 떨어지지 않았다. 아주 가끔은 고개를 푹 숙이며 '헤어지기 싫어요.'라고 칭얼대는 나 때문에 K는 우리 집으로 향하는 버스에 올라타곤 했다.


"오늘은 막차 타지 말자."

"응? 집에... 안 가요?"

"바다 보러 가자."


그때의 나는 K와 한순간도 떨어지고 싶지 않았지만 예상치 못한 제안에 약 3초간 말문이 막혀버렸다. K는 싫으면 지금이라도 집에 데려다주겠다고 했고, 나는 혹시나 K의 마음이 바뀔까 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손을 잡아끌었다. 엄마에게 무슨 거짓말을 해야 할지, 세안 후에 필요한 기본 메이크업 제품은 무엇이 있는지 생각할 겨를도 없었다. 그저 '오늘 밤은 K와 헤어지지 않아도 되는구나'라는 생각에 기쁨의 콧노래를 부르며 K의 왼팔에 매달려 지금은 생각나지도 않는 시답잖은 이야기들을 종알댔다.


우리는 서울역에서 기차를 타고 동해로 향했다. 기차 안에서도 내 시선은 오직 K에게로 향했고 내 시선이 닿는 그곳에는 언제나 나를 따뜻하게 바라봐주는 K가 있었다. 깜깜한 새벽, 동해에 도착한 우리는 날이 밝을 때를 기다리며 짧은 시간이었지만 눈을 붙였고, 따뜻한 체온을 나누며 서로의 손을 맞잡았다. 아이처럼 곤히 자는 모습을 지켜보던 나는 K의 속눈썹 개수를 세기 시작했고, 신경숙 작가의 소설 속 주인공처럼 내가 K의 속눈썹 개수를 안다는 사실만으로 세상을 다 가진 듯한 기분을 만끽했다.


K와 함께 본 겨울 바다는 정신을 차릴 수 없을 정도로 매서운 모래바람이 가득했고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차가웠지만, 내 체온이 맞닿아있는 K의 품에 안기는 순간 가슴은 벅차올랐다. 파도에 휩쓸려 새로 산 구두는 망가졌지만 K가 사준 싸구려 운동화의 따뜻함과 편안함에 속상함을 느낄 새도 없었다. 나를 안아주던 K의 가슴과 우리가 함께 거닐었던 모래사장, 그리고 부드러웠던 당신의 입술처럼 따뜻하고 편안했다.






그날 밤, 우리가 함께 올려다봤던 달을 기억해요?

그 방안, TV 속에서 조용히 흘러나오던 음악을 기억해요?

나는 당신이 침대 위에서 피던 담배 냄새, 그때의 분위기까지도 모두 기억해요. 나는 당신의 품에 안기고 싶었고, 나를 배려해주는 그 손길이 너무도 다정해서 당신의 울타리 안으로 더 들어가고 싶었어요. 그리고 그 안에서 벗어나고 싶지 않았어요.


매서운 모래바람처럼 당신이 나를 아프게 놓아 버릴 때도 제일 먼저 그날을 떠올렸어요. 우리가 함께 봤던 겨울 바다도 당신처럼 차갑고 따가웠는데. 해가 뜨길 기다리면서 당신 곁에 누워 내가 했던 고백들을 떠올릴 때마다 후회한 적도 많았어요. 더 깊이 생각하고 신중히 했어야 할 이야기였는데 내가 너무 경솔했던 건 아닌지. 그런데 이제 와 다시 생각해보면 틀린 말은 하지 않았더라고요. 만약 우리가 다시 감정을 나눌 수 있는 관계가 된다면 이 얘기를 꼭 하고 싶어요.


나는 당신이라서 좋았어요. 당신이라서 도망치지 않았고, 또 당신이라서 두려움에 흔들리지 않았어요. 그게 당신을 사랑했던 내 마음의 전부였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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