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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몽상가 J Apr 11. 2021

일당백이 필요할 땐 용병을 불러봐

프로배구는 한 팀당 딱 한 명씩 용병 선수를 기용할 수 있다. 과거에는 자유 경쟁 시스템이었으나, (남자부 기준) 2016년부터 트라이아웃 제도를 실시했다. (트라이아웃 제도는 구단이 개별적으로 선수와 만나 계약을 하는 것이 아니라, 리그에 참가하기를 원하는 선수들의 신청을 받아 한자리에 모아놓고 드래프트 형식으로 계약하는 것) 배구연맹이 트라이아웃 제도를 시작한 이유는 아주 간단하다. 과도한 몸값을 낮춰서 구단의 운영이 안정적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하고, 몰빵 배구를 지양하고 국내 선수들의 경기력을 높이면서 다양한 플레이를 볼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하지만 트라이아웃 제도를 시행하기 전, 반대의 목소리도 높았다.


트라이아웃 제도를 도입한 프로배구는 용병의 몸값 상한선이 정해져서 세계적으로 유명한 선수들을 불러오는 것이 불가능해졌다. 물론 자유 경쟁 시스템으로 용병을 데려오던 시절, 몇 개의 팀이 무시무시한 용병을 기용해 몰빵배구를 한다는 욕을 많이 먹은 건 사실이다. 하지만 그들의 화려한 플레이로 배구 경기의 재미를 더한 것도 사실이다. 이름만 들어도 플레이가 기억나는 가빈, 레오, 시몬, 아가메즈 등. 스타플레이어들의 등장만으로도 배구 경기의 재미는 한 단계 업그레이드됐었다. 그들이 속한 팀에게 우승이 몰빵되는 현상이 일어났던 것은 아쉽지만.  


지난 시즌까지 대한항공 점보스의 사령관이었던 박기원 감독이 트라이아웃 제도를 첫 시행했던 시즌에 이런 말을 했었다. 


국내 공격수 비중이 높아지기는 했지만, 그간 좋은 용병이 와서 국내 선수들의 블로킹 능력과 수비 실력을 향상시킨 측면도 있다. (트라이아웃 제도의 효과를) 단편적으로 보기는 어려운 것 같다.


배구 연맹이 노렸던 포인트는 국내 선수들의 기량 발전이었으나 사실상 수치로 따지면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는 것. 용병에게 몰빵하는 팀은 계속 몰빵하는 형식의 플레이를 보여주었다. 물론 어느 정도 국내 선수들의 역할이 중요해졌다고 하지만 모 팀의 플레이를 보았을 때 외국인 선수의 역할이 줄어든다는 느낌은 전혀 받을 수 없었다. 그리고 박기원 감독의 말처럼 실력 뛰어난 용병이 와서 국내 선수들의 실력이 향상된 부분도 없지 않아 있다는 포인트도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국내 선수들이 타 팀 용병의 플레이를 저지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노력을 했겠는가.


외국인 선수의 존재가 팀의 성적과 분위기를 바꾸는 경우를 많이 봐왔다. 2014-2015 시즌 안산 OK저축은행팀(現 OK금융그룹)에 들어온 용병 '로버트 랜디 시몬 아티' 대한민국 배구 역사를 뒤집어 놓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OK저축은행에서 2년간 함께했는데 시몬이 있었던 시즌과 그가 떠난 시즌의 성적을 보면 용병 한 사람의 존재가 얼마나 큰지 알 수 있다. 시몬이 있던 2년간 OK저축은행은 우승을 했다. 이변이 없는 한 OK저축은행의 우승은 예견된 축배였다. 그 당시 모든 팀이 OK저축은행과의 경기를 두려워했다. 시몬의 서브, 공격, 블로킹하는 장면을 눈앞에서 지켜보면서 '괴력'이라는 단어가 생각날 정도였다. 그의 플레이는 응원하는 팀을 떠나서 하나의 쇼를 보는 것처럼 흥미로웠다. 그래서 대한항공이 챔프전 진출에 실패한 시즌, 시몬의 플레이를 보겠다고 OK저축은행 경기를 예매해서 응원은 배제하고 시몬의 경기를 직관하러 안산에 갔던 적도 있다. 그날 시몬은 우승 트로피를 안고 활짝 웃었다.


시몬보다 대한항공을 아프게 한 용병은 '가빈 슈미트'이다. 2010년 초반 삼성화재에서 3년간 뛰었던 용병 가빈은 208cm의 키에서 나오는 엄청난 타점으로 매사에 대한항공 우승을 좌절시켰다. 지금도 기억나는 경기가 있다. 대한항공 홈이 현재는 인천 계양 체육관인데, 이전에는 도원 체육관이었다. 2011-2012 시즌으로 기억하는데, 도원체육관에서 대한항공과 삼성화재가 챔프전을 치르고 있었다. 지난 시즌부터 챔프전에서 삼성화재와 맞붙은 대한항공은 올해만큼은 설욕전을 펼치겠다고 당당하게 나섰지만 가빈의 활약은 쉼이 없었다. '우리도 할 수 있어! 힘을 내!'라는 응원을 할 의욕도 사라지게 만드는 위협적인 가빈 덕분에(?) 대한항공은 또 한 번의 준우승을 기록했다. 그가 지난 시즌 한국전력으로 복귀했을 때는 나이와 부상 이력이 있었기에 그나마 공포심이 덜했지만 대한항공 팬이라면 가빈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신치용과 삼성화재를 우뚝 서게 한 3인방 (안젤코, 가빈, 레오) 중 가장 위협적인 존재였다.


대한항공에도 실력 있는 용병들이 많았다. 서브로 상대팀을 묵살 시키던 '네맥 마틴', 한선수 선수와의 호흡을 기대하고 왔다가 다양한 세터와 호흡을 맞추며, 실력은 뛰어났으나 불만을 표정으로 다 드러내 쓴소리를 들었던 '마이클 산체스', 그리고 대한항공과 챔프전 우승을 함께 만끽했던 '미차 가스파리니'까지. 개인적으로 가스파리니가 정말 기억에 남는데, 가스파리니의 서브는 정말 위협적이어서 그가 서브를 넣으려고 하면 상대팀 감독들이 흐름을 막기 위해 작전 타임을 부르곤 했다. 그리고 그의 서브 타임을 알리는 웅장한 BGM도 잊을 수 없다. (대한항공은 용병이 바뀐 후에도 그 BGM을 사용하고 있다) 그리고 가스파리니의 플레이는 파워보다는 기술적인 부분이 강했는데 그래서인지 공격 모션이 꽤 아름다웠다.


배구 경기를 보면서 용병이 중요하다는 생각을 할 때도 많지만 대한항공 경기를 보면 사실상 용병의 역할은 1/N이라는 생각이 든다. 특히 이번 시즌 비예나가 부상으로 거의 뛰지 못해서 임동혁이 용병 자리를 메꿔줬는데, 대한항공 자체가 용병에게 몰빵하는 스타일이 아니다 보니 용병의 빈자리가 생겼음에도 정규리그 1위를 달성할 수 있었다. 물론 뒤늦게 요스바니가 합류해 더 좋은 성적을 거둘 수 있었지만. 연맹이 바라던 이상적인 플레이를 하는 팀이 바로 대한항공이 아닐까 싶다. 항상 '우리 팀은 몰빵이 없어!' 라고 했지만 은연중에 어려운 볼은 용병에게 올려지는데, 이번 시즌을 겪으면서 대한항공은 확실히 모든 선수들이 고루 자신의 역할을 하며 합을 이룬다는 생각이 들었다.


용병은 일당백을 하는 선수? 이제 그런 생각은 접어두는 것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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