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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몽상가 J Apr 11. 2021

듀스는 제발 피해 가게 하소서

한 세트에 25점을 먼저 가져가는 팀이 이기는 게임 배구. 보통 한 세트는 30분 내외로 마무리된다. 하지만 운명의 장난처럼 24점에서 두 팀이 만나는 순간, 지옥 같은 듀스 타임은 시작된다. 그리고 30분이면 끝나는 한 세트가 앞으로 몇 분간 더 지속될지 아무도 알 수 없는 오리무중 상태로 돌변한다. 길어봐야 얼마나 길어지냐고? 한 세트를 59분 동안 이어간 팀이 있다.


2013년 11월 26일, 대한항공과 러시앤캐시(現 OK금융그룹)는 3세트를 무려 59분 동안 경기하며 56 대 54라는 진기록을 세웠다. 당시 한 세트 최다 점수 세계기록이 2002년 이탈리아에서 세워진 54 대 52 였는데 그걸 대한항공과 러시앤캐시 선수들이 깬 것. 심지어 한 세트 경기 시간이 59분이라니, 이는 2013년 1월 23일 대한항공과 현대캐피탈 4세트 경기 기록인 48분을 넘어 또 한 번의 최장 기록을 남기게 되었다. 듀스는 31번이 반복됐고, 대한항공 용병이었던 마이클 산체스는 한 세트에만 31점이라는 대기록을 세웠다. 이 경기를 직관하지는 못했지만 방송으로 지켜보면서 간절히 기도하다가, 못 보겠다고 고개를 돌렸다가, 지쳐서 누워버렸던 기억이 난다.

듀스가 되면 2점을 먼저 따내는 팀이 승리를 한다. 아주 간단한 이 룰이 사람을 피 말리게 한다. 듀스 상황이 종종 발생하는데 듀스가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선수나 팬이나 미쳐버리는 건 매한가지. 선수들은 듀스 상황이 벌어지면 가장 먼저 체력적으로 힘들어진다. 거의 두 세트를 뛴 것과 다름없이 체력을 소모하기 때문에 만약 그 경기가 5세트까지 이어진다면 풀세트에 한 세트를 더 뛴 것과 같은 피로감을 느끼게 된다. 하지만 체력보다 정신적인 충격에서 헤어 나오는 것이 더 힘들다. 듀스가 길어지는 세트일수록 결과적으로 지는 팀은 다음 세트를 들어가기에 앞서 심리적 타격에서 벗어나야 한다. 혈투 끝에 패한 것과 다름없는 앞선 세트에서 심리적 위축감을 느낄 것이다. 물론 이를 악물고 더 열심히 해서 이기는 경우도 많지만, 상대적으로 분위기는 다운될 수밖에 없다.


대한항공을 응원하면서 힘든 순간들이 많았지만, 앞서 말했던 기록처럼 한 세트 최다 점수 기록, 최장시간 경기 기록을 모두 세우면서 팬들의 심장은 타팀 팬들보다 두 세배는 빨리 뛰었다. 지금도 기억나는 경기가 있다.


일명 챔프전으로 향하는 7번의 듀스!


2018년 3월 22일 대전 충무체육관에서 열린 경기는 챔프전 티켓을 두고 치르는 대한항공과 삼성화재의 플레이오프 마지막 3차전 경기였다. 1차전은 삼성화재 승, 2차전은 대한항공 승으로, 3차전 경기 결과에 따라 두 팀 중 한 팀이 챔프전에 진출하게 되는 정말 중요한 경기였다. 나는 이 경기를 직관했다. 중요한 경기인만큼 서울에서 대전으로 내려가는 길부터 심장은 두근거렸다. 지정석 예매는 실패했고, 덕분에 어웨이팀 응원석에서 열띤 응원과 함께 경기를 지켜보게 되었다.


1세트는 정말 팽팽했다. 무려 4점 차로 대한항공이 앞서 나갔지만, 1세트 후반 삼성화재 용병이었던 타이스의 서브에이스와 대한항공의 범실로 결국 1세트는 삼성화재에게 돌아갔다. 그러나 2,3세트는 대한항공의 승리로 돌아갔다. 이제 한 세트만 이기면 대한항공이 챔프전에 진출해 현대캐피탈을 만나게 되는 상황. 2,3세트에서 좋은 컨디션을 보여주었기에 조금만 더 힘을 내면 승산이 있다고 생각했을 때, 제발 피해 가고 싶었던 듀스 상황이 닥쳤다. 신이시여, 어찌 대한항공에게 이런 시련을 주십니까! 한번 시작된 듀스 상황은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무려 7번의 듀스 접전이 펼쳐졌는데, 이미 일어서서 경기를 보기 시작한 양 팀의 팬들은 한 점 한 점 점수가 오를 때마다 탄식과 비명에 가까운 환호가 엇갈렸다. 대한항공의 용병이었던 가스파리니의 퀵오픈으로 31 VS 30이 된 순간, 이렇게까지 기도를 해봤는지 싶을 정도로 기도를 했던 것 같다. 마지막 세터 황승빈 선수의 오픈 공격이 예상치 못한 상황에서 이루어졌고, 삼성화재는 아차 싶었을 그 순간 대한항공은 황승빈 선수의 손끝에서 챔프전 티켓을 거머쥐었다.


서울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이 경기를 다시 보았다. 특히 7번의 듀스로 이뤄낸 마지막 순간은 이후에도 생각이 나면 찾아볼 정도로 짜릿하다. 가끔 나의 배구 메이트는 이 경기에서 황승빈의 오픈 공격이 성공한 뒤 응원석에서 미친 듯이 샤우팅 하며 울부짖고 방방 뛰는 우리 모습을 찍어 보내주는데 볼 때마다 웃기면서 짜릿하고 괜히 찡해진다. 이 경기의 승리 기운이 이어져 그 해 대한항공은 처음으로 챔프전 우승이라는 최고의 성적을 거두었다. 


듀스는 너무 괴롭다. 선수도, 코칭스태프도, 팬도 듀스를 겪는 그 순간이 너무 괴롭다. 더군다나 듀스에서 지는 순간 여기가 지옥인가 싶다. 하지만 듀스 상황에서 얻는 승리는 몇 배의 짜릿함을 느끼게 한다. 듀스가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짜릿함은 더 커질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발! 듀스는 피해 가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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