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획에 없던 마음

후회되면 지금도 늦지 않았으니까

by 몽상가 J


용의주도한 계획을 세우는 동안 일어나는 뜻밖의 일들이 바로 우리에게 주어진 인생이며, 운명이란 주어진 운명에서 도망치려 할 때 바로 그 도망침을 통해 실현된다.

- 은희경 <태연한 인생> 작가의 말 中 -



가끔씩 끝이 보이지 않는 계단을 오를 때면 첫 발을 내딛기 전부터 숨을 고르며 호흡을 조절했다. 처음부터 의욕이 넘쳐 씩씩대며 오르다가 마지막 열 칸을 남겨두고 한참을 쉬어갔던 기억 때문이다. 나는 무얼 하든 계획적인 인생을 살기 원했다. 마라토너가 42.195km를 뛰기 위해 페이스 조절을 하듯 매일을 치밀하게 살기 위해 타임테이블을 작성해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 여행을 갈 때도 수많은 자료 조사와 책을 읽고 계획을 세워야 마음 편히 떠날 수 있었다. 물론 그 성격과 행동들은 지금도 여전하다. 특히 일을 할 때만큼은 실수하지 않으려 긴장의 끈을 놓지 않는 편인데 이게 얼마나 스스로를 피곤하게 하는지 겪어본 사람만이 아는 고통이다. 그럼에도 예민함을 잃지 않는 건 겁이 많아 실패를 두려워하기 때문이고, 실패에 뒤따르는 고통을 최소화하기 위한 나름의 전략이다.


"힘들면 힘들다고 말해. 후회되면 지금도 늦지 않았으니까."

"그 말 좀 안 하면 안 돼요? 내가 당신을 선택한 걸 후회할 거라고 생각해요?"

"자꾸만 거짓말하고, 숨기고, 너 그런 거... 정말 서툴러."

"알아요. 살면서 이렇게 거짓말을 많이 한 건 처음이니까."

"..... 미안하다."

"..... 그래도, 당신이라서 괜찮아요."


K와 연애를 하면서 나는 사랑이라는 감정에 매혹되어 앞뒤 상황은 생각도 하지 않고 온 마음을 다해 사랑했다. 온 세상이 뿌연 안개로 뒤덮여 있어도 오직 K의 주변은 빛나고 있음에 환호했다. 꿈속을 걷듯 행복함에 취해있는 나를 걱정하던 K는 가끔씩 자신을 만나는 것이 후회되면 언제든 이야기하라고 했다. 아무렇지 않다는 듯 어깨를 으쓱하며 괜찮다고 했지만 주변 사람들을 속이고, 핑계를 대고, 둘러대는 순간들이 닥칠 때마다 나는 사시나무 떨듯 온몸을 떨었다. 아마 나를 잘 아는 지인들은 그때의 내가 조금은 이상했음을 느꼈을 것이다.


한 사람을 온전히 사랑하는데 어떻게 아무런 준비도 없이 그 사람의 마음속으로 뛰어들 수 있는 건지, 내 상식에서는 이해되지 않는 행동을 내가 해버렸다. 누가 등을 떠민 것도 아니었는데 나는 K가 열어둔 마음속으로 전력을 다해 뛰어들었다. 다시 제자리로 돌아오게 되었을 때, 내가 얼마나 많은 아픔을 견뎌내야 하는지 눈곱만큼의 고민도 하지 않았다.


K가 나를 등지고 돌아서던 순간, 계획도 없이 K에게 뛰어든 나 자신에게 화가 나서 도저히 울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지금의 내게 그때와 같은 질문을 한다해도 내 대답은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나를 만난 걸 후회하니?"

"아뇨. 당신이라서 괜찮아요."






나는 정말 겁이 많아요. 끊임없이 계획하고 부지런히 움직이는 이유는 실패가 두렵기 때문이에요. 그랬던 내가 당신을 만나면서 조금씩 달라졌어요. 마음의 여유가 생겼거든요.


조금은 틀려도 괜찮고, 보통에 미치지 못할 정도로 느리게 걸어도 괜찮고, 내가 작은 실수를 한다고 세상이 무너지는 게 아니라는 걸 당신이 가르쳐줬으니까. 기준에서 조금만 어긋나도 불안해하던 나를 다독여주던 당신 덕분에 나 자신에게도 관대해지는 법을 배웠었는데. 그런 당신이 곁에 없으니 또다시 나는 불안하고 조급해하고 있어요.


당신을 만난 걸 후회하지는 않지만 지금 내가 당신 곁에 있을 수 없다는 정말 후회돼요. 나는 그저 당신 곁에 서고 싶은 거예요. 내가 용기를 냈던 것처럼, 이번에는 당신이 내게 다가와주면 안 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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