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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하지 않은 크리스마스

당신과 단둘이 있는 것만으로도 나는 정말 좋다고

by 몽상가 J
지금까지 내가 해온 모든 거짓말들은 다 잊더라도, 이 말만은 기억해줬으면 해. 널 만나서 정말 기뻤어. 너와의 시간은 내 인생 최고의 순간들이었어. 난 그걸 절대로 후회하지 않아. 고마워. 진심으로.

- 장강명 <그믐, 또는 당신이 세계를 기억하는 방식> 中 -


크리스마스가 되면 연인들은 전망이 좋은 레스토랑을 예약하거나 시끌벅적한 술집에서 술잔을 기울이고, 한 공간 속에 갇혀 단둘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행복한 순간들을 맞이한다. K와 특별한 관계가 된 후 처음으로 맞이했던 크리스마스 이브 날 나는 그런 순간들을 기대했고 K의 연락에 신이 나서 집을 나섰다. 그러나 그날 우리는 두 사람이 아니라 세 사람이었고, 우리 사이에 끼어있던 한 사람 때문에 시종일관 내 표정은 불쾌함을 떨칠 수 없었다. 그리고 K와 눈이 마주치면 서운하고 속상하다는 표현을 아낌없이 퍼부었다.

비로소 K를 독점할 수 있게 된 순간 우리는 불필요한 말을 아꼈다. K와 둘만의 시간을 갖게 되면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겠노라 다짐했던 마음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어색한 침묵만이 맴돌았다. 화가 났던 건 아니었지만 왠지 모를 서운함에 입을 다물었던 것 같다. 우리는 침묵이 가득한 시간을 흘려보내며 한참을 서성이다 택시에 올라탔고 자연스럽게 K의 집으로 향했다. 그리고 이소라의 노래를 들으며 꽤 오랜 시간을 뒤척이다 잠이 들어 버렸다. 그렇게 우리는 특별할 것이라 기대했던 크리스마스를 허무하게 맞이했다.

몇 시간을 잠들었을까. 아침부터 요란하게 울려대는 벨소리에 부은 얼굴과 잠긴 목소리를 최대한 일깨운 뒤 침대에서 내려와 전화를 받았다. 크리스마스 날 아침부터 내게 전화를 걸어온 사람은 선배 언니였고 일에 관해 진지하게 한참을 통화했지만 기억에 남는 말은 "강해져야 한다."는 한마디였다. 그러겠다고, 강해지겠다는 약속을 하고 나서야 긴 통화는 마무리됐다. 전화를 끊고 한참을 멍하게 앉아있다가 고개를 돌려 K를 바라보았다. 어느새 잠에서 깬 K도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멀뚱히 서로를 바라보던 K와 나는 방안에 가득 차 있던 차가운 공기보다 더 서늘하게 한참을 바라보았다.


"이리 와."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K가 작게 읊조린 한마디의 말과 나를 향해 벌린 두 팔 때문에 나는 더 이상 망설일 필요가 없었다. 내가 K의 품에 안긴 순간부터 우리의 크리스마스는 새롭게 시작됐고, 특별하게 채워지고 있었다. 그리고 갑자기 터져 나온 눈물 때문에 한참을 고개를 들지 못한 채 그렇게 시간을 흘려보냈다.






그날 아침, 당신의 방안 온도는 정말 차가웠어요. 통화를 하면서도 시린 발끝을 톡톡 쳐냈던 기억이 나거든요. 그리고 당신의 방안에 있던 작은 소품들마저 낯설게 느껴졌던 것 같아요. 왜 그랬을까요.


내가 그날 당신에게 말했었죠. 전망 좋은 곳에서 분위기를 잡고 비싼 술을 마시는 게 특별한 게 아니라 당신과 단둘이 있는 것만으로도 나는 정말 좋다고. 진심이었어요. 그래서 당신이 나에게 두 팔을 벌려주고 이리 오라고 읊조렸을 때 그 어느 때보다 행복했어요. 특별한 기운이 전해졌으니까.


다시 추운 겨울이 돌아오면 나를 따뜻하게 안아주던 당신의 품이 생각나요. 아무리 추워도 당신의 손이 잡고 싶어서 장갑을 끼지 않았던 나를 위해 재킷 주머니 속으로 맞잡은 두 손을 넣어주던 당신도 그리워요. 이렇게 날씨가 추워지면 당신이 자꾸만 생각나서 나는 어떻게 이 순간을 이겨내야 할지 아직도 모르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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