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방적인 화해의 제스처는 번번이 실패로 돌아갔다
대장부도 아니면서 나는 대장부처럼 씩씩하게 괜찮다고 대답했다.
실은 하나도 괜찮지 않았는데, 실은 외롭고, 허무하고 그래서 죽을 것만 같았는데, 실은 누구의 옷자락이라도 움켜쥐고 날 좀 어디론가 데려가 줄래요. 라고 그렇게 말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았는데...
- 공지영 <사랑 후에 오는 것들> 中 -
나는 싸우는 걸 싫어한다. 어릴 적 친구들과 사소한 말다툼을 하게 되면 어떻게 화해를 해야 하나, 미안하다는 말을 어떻게 건네야 할까를 생각하느라 극도의 스트레스를 받았다. 나는 싸우는 것보다 화해하는 순간이 민망하고 멋쩍어서 애초에 싸우는 상황을 피하려 했다. 나이를 먹어도 화해하는 방법이 서툰 건 변하지 않았다. 사회생활을 하면서 어쩔 수 없이 싸움꾼으로 전락했지만, 여전히 사과를 하거나 화해하는 상황을 마주했을 때는 어린아이처럼 머뭇거리고 차마 떨어지지 않는 입으로 오물거렸다.
우리는 아주 가끔씩 말다툼을 했는데 나는 K가 화를 내는 게 정말 무서웠다. 큰 소리를 내지 않더라도 차가운 목소리로 이야기를 하거나 표정에서부터 화가 난 K를 바라볼 때면 어떻게 해야 할지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K와 싸울 때 가장 힘들었던 건 연락이 두절되는 상황이었는데, K는 정말 화가 나면 휴대폰을 꺼버리거나 끄지 않더라도 전화나 문자를 모두 받지 않았고 그럴 때마다 나는 그저 발을 동동거릴 수밖에 없었다. 추운 날씨에 우리의 아지트에서 몇 시간 동안 K를 기다리며 전화와 문자를 끊임없이 보내기도 했지만 일방적인 화해의 제스처는 번번이 실패로 돌아갔다. 그러나 다음 날이 되면 K는 아무렇지 않게 말을 걸어왔다.
"어제 전화 왜 안 받았어요? 나 벌준 거예요?"
"아니. 서로 생각할 시간이 필요했으니까."
"그래도 연락을 안 받는 건..."
"미안. 어제는 정말 미안."
".... 나도... 잘못했어요."
밤새도록 신경이 곤두서서 잠도 이루지 못 했던 나를 향해 미안하다며 능글맞게 눈웃음을 날리는 K를 바라보고 있으면 한대 쥐어박고 싶다가도 나도 모르게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그리고 누구의 잘못이었든 우리는 서로에게 잊지 않고 사과를 했다. 그렇게 나는 싸우고 난 뒤 생각할 시간을 가지며 잘못을 뉘우치는 K의 방식에 조금씩 물들어 갔고, 조금은 나를 서운하고 아프게 하더라도 다음 날이 되면 더욱 따뜻하게 안아주는 K의 품이 보상처럼 기다리고 있음에 위로받았다.
그러나 K가 마지막 인사를 하며 차갑게 사과를 건네던 날, 나는 더 이상 K의 따뜻한 품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사실에 끝도 없는 눈물을 흘려보냈다.
"이제는 널 달래 줄 수가 없어... 미안."
당신한테 전화를 걸어서 우리가 왜 헤어져야 하는지 물었잖아요. 나를 왜 더 이상 사랑하지 않냐고도 물었고요. 당신은 마치 싸웠던 그때처럼 아무 말도 하지 않았어요. 그럴 때마다 나는 내일이면 오늘의 아픔이 꿈처럼 사라지고, 당신이 다정한 목소리로 '어제는 정말 미안했어.'라 말하며 나를 안아줄 거라고 기대했어요. 헤어지자고 했던 말은 모두 거짓이었다고.
나는 여전히 싸우는 게 싫고, 화해를 하는데 서툴러요. 당신이 아닌 다른 사람과 서툰 연애를 하며 다툴 때면 어김없이 당신 생각을 해요. 그리고 속상한 마음을 애써 달래며 내일이면 괜찮아질 거라고 스스로를 위로하죠. 당신이 내게 그랬으니까. 당신은 내 모든 것의 기준이 되어버렸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