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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중전화 부스 안에서

싸늘했던 새벽바람이 아니었다면 느낄 수 없었던 그 숨결

by 몽상가 J
나는 누군가가 좋아지면 왜 그러는지도 모르면서
저녁이 되면 어렵고, 밤이 되면 저리고, 그렇게 한 계절을, 한 사람을 앓는 것이다.

- 이병률 <바람이 분다 당신이 좋다> 中 -


어떤 드라마였더라. 약속이 없던 주말 오후, 무기력하게 소파에 앉아 드라마를 보다가 문득 K를 떠올렸다. 정확하게는 K와 함께 있던 그 공간을 떠올렸다. 비가 내리는 날 남주와 여주가 비를 피하기 위해 뛰어 들어간 곳은 공중전화 부스였고, 예상되는 시나리오처럼 두 사람은 입맞춤을 했다. 그 순간 공중전화 부스 안에 있던 K의 모습이 자연스레 그려졌다.


무더위가 지나가고 선선한 가을바람이 불 때였다. K와 나는 무슨 정신이었는지 퇴근길에 술이나 한잔하고 들어가자더니 새벽 동이 틀 때까지 몇 군데의 술집을 돌아다니며 기억도 나지 않는 시답잖은 이야기들을 나누었다. 더운 기운이 남아있던 때라 K는 반팔을 입고 있었고 나는 얇은 가디건을 걸친 상태였는데 새벽 즈음이 되니 쌀쌀해지는 기운이 온몸을 덮쳐왔다. 금요일에서 토요일로 넘어가는 새벽이라 출근 걱정을 할 필요는 없었지만, 날이 밝았다는 이유만으로 서로에게 '어서 집에 가자.'는 말을 수십 번이고 되풀이하며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애써 외면하고 있었다.


"춥지 않아요?"

"조금."

"내 가디건 잠깐 입고 있어요."


굳이 입지 않아도 사이즈가 작아 보였지만 조금씩 추위를 타는 듯한 K가 걱정되어 무작정 내뱉은 말이었다. K는 웃으며 괜찮다고 애써 벗은 가디건을 다시 내 몸에 걸쳐주었다.


"춥잖아요. 추워서 어떡해."

"바람만 살짝 피할까, 그럼?"


앞장서 걷던 K가 바람을 피하자며 들어간 곳은 공중전화 부스였다. 그때까지만 해도 우리 사이가 연인 관계는 아니었기에 드라마 주인공들처럼 그 공간 속으로 포개어 들어갈 수는 없었다. 그저 바람을 피할 정도로만 몸을 욱여넣고 그 공간을 이용해야 했다. 짧지도 길지도 않은 시간 동안 그 어떠한 말도 하지 않고 약간의 거리감을 지키며 우리는 조심스레 바람을 피했다. 그러나 순간의 침묵을 깨버린 건 나였다. 그 어떤 신호도 주지 않고, 허리 사이로 손을 넣어 K를 단숨에 안아버렸다.


"추울 것 같아서요. 따뜻한 온기라도..."

"따뜻해. 정말 하나도 안 춥다."


그때 K와 나누었던 숨결은 너무나도 달콤해서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알코올 향이 느껴지던 K의 숨결. 싸늘했던 새벽바람이 아니었다면 느낄 수 없었던 그 숨결. 그 순간 우리는 말로 표현하지 않았을 뿐,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에게 한 걸음씩 다가서고 있었다.






그 새벽, 공중전화 부스에서 서로를 마주 보고 서 있을 때, 아주 잠깐씩 당신과 내 손이 스쳤던 걸 기억해요? 그중 몇 번은 부딪힐 걸 알면서 일부러 움직이기도 했어요. 난 당신 손을 잡고 있는 순간이 정말 좋았어요. 길고 가느다란 손가락을 잡고 있으면 따뜻한 온기가 전해졌거든요. 그 온기만으로도 내가 사랑받고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었으니까. 차가운 내 손까지 따뜻하게 녹여주었으니까.


왜 나는 아직도 모든 순간순간들이 당신에게 투영되는 걸까요? 대체 무엇 때문에 당신을 잊지 못하고 이렇게 살고 있을까요, 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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