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우리가 원했던 모든 것

당신이 그냥 아무것도 아닌 존재였으면 좋겠다

by 몽상가 J

책 읽는 걸 즐겨 했던 나는 특히 소설책 한 권을 읽고 나면 주인공이 했던 사소하거나 또는 특별한 행동들을 따라 하는 걸 좋아했다. 가령 젖은 머리를 드라이기로 말려 달라고 떼를 쓰거나, 뜬금없이 지하철역을 따라 1시간을 넘게 걸어본다든지, 데이트를 하는 내내 잡은 손을 절대 놓지 않는 것처럼 별거 아닐 수도 있는 그런 행동들을 따라 하곤 했다. K는 내가 그런 행동들을 보일 때마다 어이없다는 듯 실소를 지어 보였지만 그 행동들을 같이 즐겨주는 것 또한 K의 몫이었다.


김애란 작가의 <달려라 아비> 속 <영원한 화자>라는 작품을 읽을 때였다. 나는 주인공들이 나누는 대화를 보며 K에게 정말 재미있는 게임을 알아냈다고 말했고, 궁금함이 가득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는 K를 위해 아주 잠시 낭독회를 펼쳐 보였다.


그때 당신과 나는 어렸고, 땡볕이 내리쬐는 아스팔트 위를 걸으며 지하철역을 찾고 있었다. 더위 때문에 흔한 우스갯소리조차 하지 않는 나의 눈치를 보고 있던 그는 갑자기 내게 게임을 하자고 했다. 종목은 '무엇 무엇했으면 좋겠다' 놀이. 내가 그게 뭐냐고 묻자, 그는 그냥 하고 싶은 걸 얘기하면 되는 거라고 말했다. 아니, 할 수 없는 것을 이야기해도 된다고. 지쳐 있던 내가 그러자고 하자 그는 갑자기 신이 나서 말했다.

"더 이상 욕망이 없는 사람이 지는 거다?"

그는 우선 담뱃값이 안 올랐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나는 하루 용돈이 이만 원이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그는 복권에 당첨되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나는 영어회화를 잘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생략)

한참 후 그는 네가 될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한참 후 나도 네가 될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한참 후 그는 너와 잘 수 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한참 후 나도 너와 잘 수 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우리 머리 위로는 흉조처럼 지하철이 긴 선을 그으며 지나가고 있었고
우리는 서로를 꼭 껴안은 채 오래도록 서 있었다.

그리고 어느 날,
당신은 너와 헤어졌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 김애란 <영원한 화자> 中 -


낭독회를 끝낸 뒤, 나는 K에게 '무엇 무엇했으면 좋겠다.' 게임을 해보자고 제안했다. K는 자신이 없다고 말했고, 나는 확신에 찬 목소리로 이길 자신 있으니 각오하라고 말했다. 한껏 신이 난 목소리로 사소한 소원부터 읊기 시작했다. 나는 마른 목을 축이기 위해 시원한 맥주를 원 없이 마시면 좋겠다고 말했고, K는 내일이 토요일로 바뀌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나는 콜라병 몸매가 되면 좋겠다고 말했고, K는 하루빨리 콜라병 몸매가 된 나를 만나면 좋겠다고 말했다. 자신이 없다던 K는 오래전부터 이 게임을 알고 연습했던 사람처럼 엄청난 욕망을 쏟아냈다. 시간이 가는 줄도 모르고 우리는 게임에 열중했다.


한참 후 나는 K에게 언제나 사랑받으면 좋겠다고 말했고, K는 나와 함께 있는 모든 순간이 영원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그리고 나는 K의 길고 하얀 손을 쓸어 담으며 사랑한다고 말했고, K는 내 입술을 매만지며 사랑한다고 속삭였다. 마치 우리가 말한 모든 욕망이 이루어질 것 같은 기분을 느끼며 우리는 그렇게 한참을 서성였다.


그리고 어느 날, K는 내가 더 이상 아파하거나 울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그렇게 K의 마지막 소원을 위해 우리는 헤어짐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K가 나를 스쳐 돌아서던 그 순간까지도 나는 기도했다.


'당신 때문이라면 울어도 좋고, 아파도 좋으니... 다시 돌아와 줬으면 좋겠다.'





당신과 헤어지고 난 뒤, 가끔씩 당신과 연락을 하고 술을 한 잔 기울일 때마다 내가 속으로 얼마나 많은 다짐을 하고 기도를 하는지 알아요?


'당신이 내 마음을 읽어주면 좋겠다.'

'그동안 힘들었지, 라며 따뜻하게 안아주면 좋겠다.'

'다시 시작하자고 말해주면 좋겠다.'


왜 아직도, 누군가를 만나고 사랑을 하고 이별을 하는 순간순간마다 자꾸만 당신의 그림자가 밟히는 걸까요? 이제는 잊을 때도 됐는데 갑자기 찾아오는 딸꾹질처럼 당신을 불현듯 떠올리게 돼요. 그럴 때마다 당신의 기억과 함께 눈물이 차오르는 건 도저히 막을 방법이 없어서 나는 괜한 변명거리만 늘어놔요. 얼마나 더 오랜 순간들을 지나치고 단단해져야 당신을 마주해도 내 마음이 흔들리지 않을까요.


이제는 그런 소원을 빌어봐요.

'당신이 그냥 아무것도 아닌 존재였으면 좋겠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아프면 아프다고 말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