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렇게 뒤에서 안는 거 좋아하잖아
울 줄 아는 사람은 강한 사람이다.
남에게 눈물을 보일 줄 아는 사람은 강한 사람이다.
누가 보건 말건 슬픔을 드러낼 줄 아는 사람이 진정으로 강한 사람이다.
- 레지너 브릿 <삶은 나를 배반하지 않는다> 中 -
나는 잔병치레가 많은 편이 아니다. 굉장히 건강하다가 한 번 아프면 일주일을 앓아누울 정도로 폭발하는 스타일인데 그럴 때마다 주변 사람들에게 얼마나 민폐를 끼치는지 모른다. 민폐를 끼치는 게 너무 죄스러워서 아파서 죽을 상을 하고 있으면서도 누가 말을 걸어오면 웃으며 "괜찮아요."라고 미련하게 답한다. K는 그런 나를 못마땅해했고, 아프면 아프다고 말하고 티를 내는 게 오히려 주변 사람들을 덜 힘들게 하는 거라고 쓴소리를 했다. 그럼 나는 알겠다고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괜찮으니 내 걱정 말라고 오히려 K를 다독였다.
K는 시크한 분위기 때문인지 쉽게 다가가기에는 어려움이 있는 스타일이었다. 물론 사람을 괴롭히거나 일부러 센 척을 하는 사람은 아니었지만 절대 만만하게 볼 수 없는 상대였다. 그런 K가 유일하게 자신의 몸과 마음을 해방시키는 상대는 나였고, 남들에게는 오픈하지 않는 애교 섞인 행동과 멘트를 보여줄 때면 나는 괜히 으쓱해지곤 했다. 특히 K는 아플 때면 한없이 어리광을 부렸는데 나는 안쓰러운 마음 때문에 가슴을 졸이면서도 한 편으로는 아픔을 온몸으로 표현하는 K의 모습이 귀여워서 남몰래 웃음을 참아야 했다.
"나 많이 아픈 거 같아."
"어디 가요? 왜? 감기? 열나요? 어떻게 아픈 건데!?"
하루 종일 야외에서 업무를 보던 K가 아프다는 문자를 보냈던 날, 나는 쌓여있는 일을 제쳐두고 K에게 온 신경을 집중했다. K는 아프다는 말을 간간이 보내면서도 걱정 말라고 나를 안심시켰다. 나는 괜찮다는 말을 한 귀로 흘려들으며 퇴근 시간에 맞춰 죽과 과일을 사들고 K의 집 근처에서 서성이고 있었다. 초조함과 걱정스러움이 뒤섞인 마음으로 휴대폰의 불빛이 울리기만을 기다리고 있는데 누군가 등에 얼굴을 포개고 조심스럽게 나를 껴안았다.
"얼굴 보여줘요. 얼마나 아픈지 얼굴을 봐야...."
"이렇게 뒤에서 안는 거 좋아하잖아."
"꾀병이에요? 지금 농담이 나와요?"
"아파... 아프니까 그냥 이대로 조금만 있자. 응?"
한참을 기대어 서 있는 K에게서 뜨거운 기운이 전달되는 걸 느끼던 순간 온 힘을 끌어모아 K의 몸을 억지로 돌려세웠다. 열 때문에 이미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K를 보자마자 나도 모르게 화를 낼 뻔했다. 아프면 아프다고 말하라 더니 정말 말로만 아프다고 하고 약도 안 먹은 걸까. 하루 종일 나를 제외한 그 누구에게도 아프다는 말을 하지 않았을 걸 생각하니 어른들의 말처럼 피가 거꾸로 솟는 기분이었다. 아픈 사람에게 잔소리해봐야 들릴 리 없다는 걸 알기에 택시로 집에 데려다주며 잠시나마 쉴 수 있도록 무릎을 내어주는 게 아픈 K를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배려였다. K의 두 손에 죽과 과일을 쥐여주고 집에 들어가는 걸 확인한 뒤, 나는 협박성 문자를 보냈다.
' 아프면 아프다고 말해요. 참지 말아요. 아프다고 아무나 뒤에서 껴안지도 말고.'
일이 너무 힘들어서 고개를 떨구고 있을 때, 당신이 내 무릎 위에 앉았던 날 기억해요? 버스정류장 벤치에서 당신 등에 얼굴을 기대게 해줬잖아요. 무겁다고 저리 가라고 했지만 사실은 당신이 내어준 그 등에 하루 종일 얼굴을 파묻고 싶었어요.
그때 내가 아주 조용히 말했죠. 계속 이렇게 내 옆에 있어주면 좋겠다고. 속삭이듯 말했더니 당신이 물었잖아요. 뭐라고 말했냐고. 그냥 푸념처럼 뱉은 말이어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고 둘러댔는데 그때 솔직하게 말할 걸 그랬어요. 더 오랜 시간 동안 내 옆에 있어달라고, 솔직하게 말할 걸 그랬어요.
조금만 더 곁에 있어주지 그랬어요. 당신의 품이 얼마나 필요했는지 알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