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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몽상가 J Jul 06. 2020

미나리와 콩깍지

미나리에 관한 지극히 개인적인 이야기


사랑에 급히 빠지는 자들을 일컫는 말로 '금사빠'라는 단어가 있다. 아주 작은 행동이나 말 때문에 누군가를 좋아하게 되는 경우에 종종 쓰이는데, 나 역시 '금사빠'인 시절이 있었다. (친구들은 여전히 넌 금사빠야,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본인은 부정하는 부분)


전혀 관심 없던 가수의 목소리가 새벽 퇴근길 택시 안에서 흘러나오는 걸 듣고 사랑에 빠진 적이 있다. 그날은 아침 출근길부터 버스를 놓치고, 출근과 동시에 대형 사고가 빵빵 터져서 정신없는 하루를 보냈고, 위아래로 치고 들어오는 질문과 압박 때문에 스트레스가 최고치에 달했다. 릴레이 회의를 했지만 아무것도 건지지 못한 채, 결국 막차를 놓치고 택시를 탔다. 미터기가 올라가는 걸 지그시 바라보며 오늘도 길에 헛돈을 뿌리고 있구나, 하며 인생무상을 느낄 무렵 기사님이 틀어놓으신 노래가 귀에 꽂혔다. 이미 오래전부터 알던 가수였는데 이 가수가 이런 매력적인 보이스를 가졌구나,라는 생각과 함께 소심하게 따라 부르기 시작했고, 그날 이후 난 그 가수의 열혈 팬이 되었다. 단 한 곡의 노래를 듣고, 사랑에 빠진 것과 다름없었다.


예전 글에도 썼지만, 누군가를 마음에 담는 시간은 불과 3초! 그러니 금사빠를 손가락질하기보다는 인간의 본능이라고 생각해 주면 좋겠다.


 




짧은 야외 촬영을 마치고 스태프끼리 이른 저녁을 먹었던 날. 나는 아주 사소하지만, 인상 깊은 한 장면으로 누군가에게 콩깍지가 씌었다. 


웬만한 음식은 다 먹는 내가 거들떠보지도 않는 몇 가지가 있는데 선지, 가지무침, 그리고 미나리다. 그중에서도 미나리를 가장 힘들어하는데... 미나리가 음식에 들어가면 마치 다 된 밥에 향수를 뿌린 것처럼 먹지 못할 음식이 되어 버린다. 매운탕에 올라간 미나리, 볶음밥에 잘게 들어가 섞여버린 미나리, 삼겹살을 먹을 때 함께 먹기 위해 등장한 미나리 등 내 식탁 위를 종종 위협하는 미나리 때문에 후각 레이더를 예민하게 작동시켜야 한다. 


그날은 기분 좋게 샤부샤부를 먹고, 마무리로 볶음밥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 자리에서 볶아주는 게 아니라 주방으로 직접 냄비를 들고 가 볶음밥을 만들어주는 시스템이었다. 별생각 없이 수다를 떨며 앉아있었는데, 내 눈앞에 등장한 냄비 안에는 녹음이 우거진 연둣빛 볶음밥이 가득 들어있었다. 사회생활을 하면서 타인에게 피해주는 걸 극도로 싫어하는지라 웬만하면 밥을 먹을 때 음식 취향으로 싫은 티를 내지 않는 편인데, 예상치 못한 현실을 마주한 순간 나도 모르게 소리를 질렀다.


"으악! 미나리!"


나와 같은 테이블에 앉아있던 스태프들은 일제히 무슨 일이냐고 음식에 뭐가 들어갔냐고 호들갑을 떨며 나를 예의 주시했고,  이미 샤우팅을 마친 뒤라 어떻게 이 상황을 얼버무려야 할지 고민에 고민을 거듭할 때쯤! 동화 속 왕자님처럼 나의 구세주가 등장했다. 여자 친구가 없는걸 알고 내가 정말 아끼는 대학 동창과 소개팅을 시켜줄 만큼 인상도, 인성도 좋은 피디님이 바로 나의 구세주! (tmi 지만, 대학 동창과 결과적으로 잘 되진 않았다.) 그는 왜 그러냐며 묻는 사람들과는 달리 조용히 숟가락을 들더니 볶음밥 위에 수놓아진 자잘한 미나리를 하나씩 걷어내고 있었다. 


"아, 안 그러셔도 돼요! 저 이미 배불러요."

"저도 미나리 안 좋아해서요."

"아... 진짜죠? 저 때문에 괜히 그러시는 거 아니죠?"

"(미소)"

"저 안 먹어도 되는데..."

"(다른 사람들 쳐다보며) 여기 부분만 빼고 먼저들 드세요."


참 괜찮은 청년이라 생각했지만 딱히 마음에 둔 적 없는 사람이었는데... 나는 미나리를 걷어내던 그에게 잠시나마 '반했다'. 


저 섬세한 마음을 보라

저 집중하는 눈빛을 보라.. 

저 든든한 팔뚝을 보라.

저 다부지게 숟가락을 쥔 손가락을 보라. 

 

그렇게 그의 배려로 소량의 볶음밥을 나눠 먹은 뒤, 모두가 차를 타고 떠났지만 우리는 배가 부르다는 핑계로 잠시 걸었다. 특별한 말이 오고 가지 않았지만, 그 순간 내 머릿속에는 '이런 남자를 만나야겠다'라는 금사빠 본능이 일깨워지고 있었다. 아쉽게도 그와는 특별한 인연이 이어지지 않았지만 (솔직히 10년 전 일이라 이후에 그와 어떻게 지냈는지도 생각나지 않음) 미나리를 걷어내던 그의 모습은 정확히 기억난다. 인상 깊은 영화 속의 한 장면처럼.






그 당시 친구들이 이상형이 뭐냐고 물어오면 나는 스스럼없이 답했다.


"나를 위해 볶음밥 위에 잘게 썰어진 미나리를 걷어주는 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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