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울할 때 나는 포도주스를 마신다
먼저 상대방이 싫어진 사람이, 아직 상대방이 싫어지지 않은 사람과의 관계에서 주도권을 가지는 것이다. 말하자면 룰을 지킨 사람이 궁지에 몰려 벌을 받는 유일한 게임, 그건 바로 사랑이라는 것인지도 모른다.
- 공지영 <별들의 들판> 中-
다이어트를 하면서 하루에 물을 2L씩 먹는 습관을 들였다. 그러나 그 습관을 들이기 전까지 나는 마시기 기능이 제로에 가까웠다. Take out 잔에 담긴 커피도 책상 위에 올려두고 하루 종일 마셔야 할 정도였다. 그런 이유 때문에 편의점 쇼핑 목록에서 캔 음료는 제일 먼저 제외되곤 했다. 두고두고 마실 수 있는 뚜껑 있는 음료만이 나의 장바구니에 안착할 수 있었다.
하지만 정말 마음이 답답해서 아무것도 손에 잡히지 않고 그 누구의 말도 들리지 않을 때, 캔에 담긴 콜라를 사서 벌컥 벌컥 마시는 게 유일한 스트레스 해소 방법이었다. 그리고 고통에 신음하며 장렬히 전사. 미련하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내가 무의식 중에 행하는 수많은 행동 중 오랜 시간을 지켜온 습관이었다.
K는 피곤하거나 호랑이 기운이 필요할 때면 포도주스를 마셨다. 그리고 마시다 남긴 주스를 그대로 냉장고에 넣어둔다고 했다. 병문안이나 친구 집에 놀러 갔을 때 우연히 마시는 경우가 아니고서야 특별히 접할 기회가 없었던 포도주스.
"내가 좋아하는 거 전부... 너도 같이 좋아했으면 좋겠어."
"이기적인 생각인 거 알죠?"
K와의 만남이 깊어질수록 내 습관이 하나둘씩 재설정되고 있음을 인지했다. 그리고 K와의 헤어짐에 조금씩 익숙해져 갈 때쯤 나는 이미 변해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속이 답답하고 머리가 지끈지끈하여 편의점에 달려간 내가 거침없이 선택한 음료가 콜라가 아닌 포도주스임을 확인하던 날, 내가 얼마나 K에게 동화되어 있는지 느낄 수 있었다. 나에게는 ‘포도주스 = K의 위로물’이라는 공식이 자리 잡고 있었고, 그렇게 나는 K의 사소한 습관마저 간직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정말 많이 달랐어요. 하나부터 열까지.
지금도 난 당신이 좋아하던 노래, 책, 음식, 사람, 심지어는 사소한 당신의 습관마저도 처음부터 내 것이었던 것처럼 행동하고 있어요. 당신이 이렇게 나를 바꿔 놓았잖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