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위의 집
첫 아티스트 토크 프로그램을 마치고 집으로 향하는 트램.
(베를린에서 큐레이팅을 공부하는 분과 함께 1년간 아티스트 토크 프로그램을 운영했었다.)
갑자기 멈춰 선 정류장. 오늘은 여기까지만 운행한다는 방송.
나는 트램에서 내려 천천히 걷다가 하늘에 커다란 달이 떠있는 것을 보았다.
구름이 달 위로 흘러가고 달은 늘 그랬듯이 내게 무언가 말을 건네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달이 얼굴처럼 보이고 그녀의 입술이 옴짝달싹 얘기하는 것 같은. 형상.
유럽에 온 후 하늘을 보는 날도 참 많아졌고 그래서인지 달이 참 가깝게 느껴졌다. 그리고 지금처럼 보름달이 되면 항상 내게 뭔가를 말해주는 듯하다.
'다 지나간다'
구름이 흘러가는 사이로 더 선명하게 보이는 달은 그렇게 말했다고, 믿었다.
걱정하지 마라. 걱정하지 마라.
순간 내가 이곳에서 많이 자란 걸 알았고, 또 저 큰 달 앞에 아직도 내가 얼마나 작은 존재인지 알게 되었고,
그래서 눈물이 났다.
2015년 8월. 베를린.
2016년 오늘.
네덜란드에서 개인전을 잘 마치고 쉬고 있는데 몸에 심각한 알레르기 반응이 생겼다. 잘 쉬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마음속엔 어떤 커다란 스트레스가 움츠리고 있다가 몸에 꽃을 피운 것이다.
휴식에 대한 두려움. 계속해서 뭔가를 계획해야 한다는 압박감.
서울에 있는 언니에게 전화가 왔다. 내 인스타그램을 안 봤었는데 오랜만에 만난 친구가 네 동생 거라며 보여줬다고. 언니는 내가 생각이 너무 많은 것 같다고 했다. 작업에서도 네 생각과 욕심이 그대로 드러나니까 언제나 네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인지하고 삶의 여백을 좀 가져보라고 했다.
알레르기 때문에 몸이 가려워 잘 수 없을 때, 나는 생각했다. 이유가 뭘까? 식습관 때문일까. 스트레스일까. 야외에서 잔디 위에 잠깐 앉았었기 때문일까. 햇빛에 너무 노출이 되었나. 등등.
몸에 열꽃이 피고, 내 눈에 계속 보이는 흉터와 습진 때문에 나는 끊임없이 이유를 찾아야 했고 해결방법을 검색해야 했다. 그리고 반성했다. 내 작업들이 항상 '중간'에 머물러 있는 이유에 대해 (내 스스로 평가하자면) 이렇게 깊게 고민해본 적이 있었나 하고.
네덜란드에 그리고 독일에 온 후 나는 열심히 살아왔다고 생각한다. 나 스스로 훌륭하다 칭찬하면서 그렇게 지금까지 잘 지내왔다. 그런데 여전히 제대로 된 휴식을 취하지 못하고, 또한 내 작업에 대해 보다 정확한 검진을 하지 못하고 있다. 돌아볼 시간도 없이 앞으로 나아가야만 한다는 압박 때문일 것이다.
문득 여기 오기 전, 지인이 내게 해 준 말이 생각났다.
"외국에 오래 살면 어느 순간 정신적 '미아'가 되는 순간이 와요. 그럴 때 잠깐 집에 오는 것도 좋아요.
그 시간을 놓치면 어디에 있어도 '집'이라는 생각을 갖기가 어려워져요."
2013년, 네덜란드에 3개월 머물고 다시 집에 갔을 때 뭐가 그리 피곤했는지 거의 한 달을 잠만 잤던 기억이 났다. 지금은 이곳 생활에 익숙해졌다고 생각해도, 저 마음 깊은 곳에는 더 잘 버텨야 한다는 압박이 자리하고 있다. 엄마 냄새가 나는 방에서 익숙한 음성의 라디오를 들으며 쉬고 싶다는 생각.
그래서 오늘 나는 그때처럼, 달이 해주는 말이 필요하다.
걱정하지 마라, 다 잘- 지나갈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