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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긴 여정

by Artist K

오늘은 3년 전 이맘때 쓴 일기를 다시 펼친다. 그때도 난 여기에 있었고, 지금처럼 중요한 결과를 기다리고 있었고, 결과에 대해 생각보다 많이 절망하지 않았던 것 같다. 똑같은 나인데 일기를 쓰다 보면 과거의 나와 지금의 내가 보인다. 아니, 과거의 나를 통해 지금의 나를 조금 읽게 된다.

2013년 11월 15일

어젯밤에 최종 불합격 통보를 받았다. 절망. 조금은 익숙한 이 절망의 느낌.

이메일로 받는 불합격 통지는 언제나 더 차갑게 느껴진다. 새벽에 한 번만 더 기회를 더 줄 수 없냐는 메일을 보내고(어떻게 그런 메일을 쓸 수 있었는지.) 물론 아무 기대 없이 잠들었다.

다음날 예상대로 다시 한번 거절의 편지를 받고 사실을 받아들였다. 그날 암스테르담의 도서관 계단에 멍하니 앉아있었다. 머릿속이 하얗게 텅 빈 느낌이 인데 속도 비었는지 꼬르륵.. 소리가 들렸다. 생각보다 맛있는 빵을 씹으며 앉아있는데 지난번 도서관에서 만났던 마틴이 말을 걸어왔다. (그는 도서관에서 처음 나를 보았을 때 한국 사람이냐고 물어봐서 나를 깜짝 놀라게 한 남자?로 중국문화를 공부한 사람이었다.)

그냥 내 절망을, 나를 잘 모르는 그에게 털어버리고 싶었다. 그는 같이 걷지 않겠냐고 물었다. 꽤나 긴 거리를 걷고 또 걸으니 이 아름다운 도시에서 나만 절망적인 것은 아니라고 누군가 말해 주는 것 같았다. 나와 동행해준 그는 (잘 모르지만) 괴짜 같기도 하고, 세상에 적응하기 힘든? 사람처럼 보이긴 했으나 따뜻한 사람으로 기억된다. 그는 내게 따뜻한 위로의 커피를 사주고 돌아갔다. 나도 집으로 터벅터벅 걷는데 하늘에 달이 환하다.

다시 한번 '불합격'의 쓴맛이 목을 타고 내려와 심장을 찔러댔지만, 내가 힘들 때 누군가 뿅 하고 나타나 준 것만 같아 괜찮기도 했다. 그를 다시는 못 볼 것 같다는 생각을 잠깐 했었다. 마치 힘든 나를 위해 달에서 잠깐 내려와 준 사람 같았으니까.

마음이 이렇게 따뜻해진 걸 보니 나는 참 복이 많은 사람이다.

2016년 11월 20일

끝도 없는 절망으로 시작해서 '나는 참 복이 많은 사람'으로 끝나는 일기였다. 피식 웃음이 나왔다.

IMG_0633.JPG The Flower_Kelly Jang

요즘은 '나'에 대해 연구를 하고 있다. 내가 그린 꽃과 풍경 그리고 정물 그 모든 것들이 사실 내 모습과 많이 닮아 있다. 그리고 요즘 한국에서 일어나고 있는 엄청난 일들을 보면서 나는 내 고향과 '나'에 대해 더 많은 호기심을 갖게 되었다. 한 나라에서 지금 일어나고 있는 슬픈 현실이 단순히 작가의 호기심으로 일축될 수는 없다. 그러나 '왜'라는 생각이 계속 꼬리를 물었다. 왜 내가 지금 머무는 이 나라의 시스템과 그렇게 다를 수밖에 없는가. 어떤 본질적인 문제가 뿌리 깊이 잘못되어 있는가? 이제 잘못을 알아내었다면 바꾸어 갈 수 있는지, 어디서부터 어떻게 바꾸어나갈 것인지... 아마 더 많이 깨어져야 하고 부서져야 할 것이다. 삶과 죽음에 대해 '말로 하지 못했던 것'을 이미지로 표현해 왔던 나는 이제 삶과 죽음의 실체인 나와 나의 본질에 대해 돌아보고 싶어 졌다.

photo.jpg Study about identity_immigration_2016_Kelly Jang

나는 어디서 왔으며 누구이고 어디로 가는가. 고갱의 그림 제목처럼 나는,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는지. 잘 걸어가려면 되짚어 봐야 할 것 같다. 나는 이방인처럼, 그러나 아픈 마음으로 우리나라를 지켜보고 있다. 몸이 멀리 있으니 마음도 서서히 멀어지는 것만 같다. 여기서 나는 이방인이다. 몸은 이렇게 여기 있고 적응을 잘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어딘가에 소속된다는 것이 계속 어렵기만 하다. 어쩌면 더 이상 깨지는 것이 두려워진 걸까. 내 경계를 지켜려다보니 나도 모르게 열등감이 생겨버린 건 아닐까.

핑계 아닌 핑계를 대면서 5월 개인전 그리고 8월 아트페어 이후 아무것도 실행한 것이 없다.

그리고 지금은 중요한 결과를 기다리고 있으며, 이 정착하지 못하는 삶에서 무엇보다 제2의 플랜도 필요하다.

지금의 내가 3년 전의 나보다 나아진 것일까.

지난 3년 동안 '무지'로 용감했던 나는 포기란 걸 모르고 많은 도전을 했었다. 그리고 모든 것이 내겐 '처음'이었기에 가능한 일들이었다. 내가 이 곳 생활에 익숙해질수록 두려움 또한 늘어나는 것을 느꼈다. 자꾸만 결과에 집착하는 것도 어쩔 수가 없었다. 그래도 나는. 아직 갈길이 멀고, 어떤 벽 앞에 잠시 멈춰있다는 것은 알고 있다. 그리고 이렇게 길이 막혔을 땐 '초심'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도.


이와 중에 잠시 엄마 집에 다녀오기로 결심했다. 나를 여기에 오게끔 도와줬던 멘토는 '초라해지지 마라'라고 내게 말해주었다. 그 멀리서 지금까지 견뎌 낸 것도 잘한 일이니 아무 걱정 말고, 어깨 펴고 오라고 말해주었다.

나는 목이 메어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내가 나에게 해줄 수 없었던 위로.


결국 오늘도 '나는 참 복이 많은 사람'으로 끝나는 일기를 쓴다.

2016년 11월, 비가 많이 내리는 일요일. 네덜란드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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