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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rtist 켈리장 Aug 20. 2019

여행자, 예술가 그리고 노바디 Nobody

- Feat. 여행의 이유_김영하 산문

요즘 내가 가장 집중하고 있고 또 가장 큰 스트레스이기도 한 것은 영주권 문제이다. 해당 국가에서 제한 없이 거주와 취업을 할 권리. 나는 그 권리를 얻기 위해 작년 겨울부터 올해까지 지난한 시간을 보냈다.

이제 거의 다 끝이 났고, 마지막 단계인 일할 수 있는 권리를 얻기 위한 시험이 남아있다.

이는 내가 이곳에서 취업할 수 있는지, 외국인으로서 경제적으로 독립할 수 있는 의지와 능력이 있는지 알아보기 위한 인터뷰이다. 

나는 이미 일명 '포트폴리오'- 한국에서는 어떤 직업을 갖고 있었는지, 이곳에서는 어떤 직업을 갖기 원하는지를 자세히 기입해야 하는 서류-를 보낸 상태이고 그 서류가 통과되면 인터뷰를 하게 된다.

나에게 정말 힘든 이 과정은, 외국인들이 이곳에 무작정 와서 방황하거나 제대로 직업을 못 구해서 범죄의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만든 제도라고 한다. 

외국인의 영주권을 위해 이 나라의 기본적인 언어를 필수적으로 공부하게 만들고, 직업을 찾게 만드는 시스템.

한국에서 오래 살아온 나로서는 쉽지 않은 과정이었고 종종 외국인이, 나 자신이 이 나라에 받아들여지는 것에 대해 생각하게끔 했다. 

The tattooed flower (part) 꽃, 부분

그래서인지 김영하의 책 <여행의 이유>에서 아델베르트 폰 샤미소의 소설 '그림자를 판 사나이'에 대한 내용이 내게 절실히 와 닿았다. 소설 속, 그림자를 재물과 바꾼 사나이는 평생 힘들게 살아가다가 방랑자(여행자)가 된다. 그림자가 없는 사람은 같은 '사람'으로 타인에게 받아들여지기 힘들기 때문이다. 여기서 그림자란 '사람을 사람으로 만드는 무엇' 다른 말로 하자면 성원권이라고 작가는 말한다.


우리가 사람으로 살아가려면 타인이 우리를 사람으로 받아들여주어야 한다... 중략...

오디세우스는 그림자가 없는 상태, 걸인의 모습으로 이타케로 돌아온다. 그는 진짜 오디세우스여야만 한다. 그 '장소'에 적합한 '사람'임이 입증되어야 하는 것이다...

... 페넬로페의 침대에 누운 오디세우스는 비로소 깨달았을 것이다. 그토록 길로 고통스러웠던 여행의 목적은 고작 자기 자신으로 돌아오기 위한 것이었다. 

... 자주 떠도는 이들이라면 한 번쯤 오디세우스와 같은 선택의 순간에 직면하게 된다. 방랑을 멈추고 그림자를 되찾을 수 있는 어떤 곳으로 돌아가 자기 자신이 되어야 할까? 과연 그런 곳이 있기나 할까? 나는 거기서 받아들여질까? 요술 장화를 신고 영원히 떠돌아다니는 슐레밀, 그림자를 판 사나이가 내 운명은 아닐까?

김영하 <여행의 이유> 중.

저녁 산책 중. 레지던스 근처 작은 언덕. 네덜란드.

영주권을 위한 최종 인터뷰를 준비하면서, 인터넷에서 꿀팁을 찾아냈다. 인터뷰를 위한 서류를 작성하기 전에 스스로 세 가지 질문에 대답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Wie ben ik? Wat wil ik? Wat kan ik? 

나는 누구인가? 나는 무엇을 원하는가? 나는 무엇을 할 수 있나?

길 위의 집. 켈리 장

나는 직업을 찾기 위한 이 서류와 인터뷰에 당연히 예술가라는 직업은 해당이 안된다고 생각해서 다른 직업들을 찾아내었다. 그래서 제대로 알지도 못하는 직업에 대한 서류를 작성하고 인터뷰에 임했다가 낭패를 겪고, 다시 서류를 작성해야 했다. 다시 잘 알아보니 예술가도 하나의 직업군이며 지금 내가 하는 일에 대해 설명하면 되는 것이었다. 또한 나에겐 이 일련의 준비과정이, 예술에 관련된 다른 직업들도 알아볼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었다. 

 나는 처음에 이민국의 시점으로(눈치를 보며) 서류를 작성했고, 그에 맞는 시험에 통과만 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한국에서 입시를 겪은 좀 오래된 세대로서, 나는 이 나라에서 매번 어딘가에 '쾅' 부딪히고 깨닫게 된다.

내가 예술을 직업으로 지금까지 살아왔건만, 비자에 문제가 생길까 눈 가리고 아웅 했던 내가 너무 부끄러웠다.

작업 부분, 켈리 장

나는 이 곳에 살아남기 위한 권리를 위해 열심히 준비해왔고 지금도 노력 중이다. 나는 내가 왜 이곳에 이토록 머물고 싶은지 그 이유에 대해 잘 알지 못했다. 그런데 영주권을 준비하면서 나는 더욱 이곳을 사랑하게 되었다. 시험을 위한 시험이 아닌 사람이 사람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도록, 내가 나 자신으로 돌아오기 위한 과정. 

나는 지금 내 몸과 정신에 온전히 베어버린 고질적인 문화를 다시 돌아보고, 그런 나를 좋은 방향으로 이끌어주는 시험을 준비하고 있다.

한국에 살 때 내가 잃어버렸던 나의 그림자를, 나는 이상하게도 이곳에서 찾은 기분이 든다. 그러나 아직 내가 이 장소에 적합한 사람인지는 모르겠다. 이 나라에서 나는 모든 것을 다시 시작해야 한다. 그동안 독일을 오가며 쌓아온 경험들은 말 그대로 경험으로 두고, 이곳에서 나는 또다시 새로운 관계를 만들어야 하고 일해야 한다. 

이 시점에서 김영하 님의 책 <여행의 이유>는 내게 이 삶을 잘 여행하라고 알려주는 지침서처럼 다가왔다. 나에겐 타향살이가 마치 끝나지 않는 여행처럼 느껴지기 때문일 것이다.

이 책 덕분에 나는, 나의 허영과 자만에서 비롯된 불필요한 고난의 기억들을 가슴에 새기며, 다시 '노바디'로서 이 시간을 잘 여행하리라!


여행자는 스스로를 어떻게 생각하든 상관없이, 결국은 아무것도 아닌 자, 노바디 nobody일 뿐이다.

.... 남의 땅에서 우리의 힘은 약해진다. 약해지기 때문에 더더욱 자기 존재를 타인으로부터 확인받고 싶어 한다.... 2800년 전에 호메로스는 여행자가 지녀야 할 바람직한 태도를 오디세우스의 변화를 통해 암시했다. 그것은 허영과 자만에 대한 경계, 타자에 대한 존중의 마음일 것이다.

김영하 <여행의 이유>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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