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얍'하는 정답은 정말. 어디에도 없다
항상 장기여행을 하고 돌아오면, 뭔가를 다 해 낼 수 있을 것 같은 착각에 빠진다. 하지만, 한국의 힘은, 좀더 정확히 내가 사는 서울의 힘(혹은 장소를 불문하고 '일상의 힘'인지도 모르는)은 너무나 거대해서 돌아오면 '뭔가를 해야 한다'는 강박에, 그리고 실제로 자질구레한 많은 '해야할 일'들에 함몰당하기 시작한다. 그래봤자 밥을 먹고, 친구/지인들과 연락을 취하고, 가족을 방문하고, 운동을 하고...... 등등의 일들이다. 나를 위한 일들이긴 하지만 그마저 체계적 계획으로 세워지면 그렇게 나는 여행지에서 쌓아간 야생의 감각을 잃어간다.
아쉬운 것은 이 감각을 잃어간다는 것이다. 해야할 것들에 밀려 내 의지가, 내가 하고 싶은 것들을 생각없이 저지르지 못하는 상황. 그래서 결국 해야할 것들에 함몰되는 상황.
감정은 소복이 쌓인 살얼음 같아서 무언가 물체가 닿기만 하면 그 형체는 금세 변형되거나 사라진다. 이 과정이 마음 안에서 차근차근 진행되는 걸 보는 건 꽤나 큰 상실감이 든다. 그래도 삶이 에너지를 채웠다고 자족하며 현실로 돌아온다. 각박한, 정말로 각박한 현실로. 인정이 비정함으로 맞바뀐, 배려와 이해가 상실된 세계. 그 안에서 그들은 바쁘게 돌아가고 나의 충전된 활기는 그렇게 스멀스멀 사그라진다.
이 과정을 이렇게 상세하고 담담하게 묘사할 수 있는 건, 긴 세월 여행과 일탈 그리고 직장생활을 핑퐁게임처럼 번갈아가며 했기 때문일 것이다. 안타깝고 아쉽다. 내가 어떻게 쌓아온 감정인데 이렇게 하늘로 날아가버리게 내버려두다니. 이렇게 쌓아온 감정, 그리고 에너지로 뭔가 시작해야 하는 것 아닌가. 적어도 참신한 사업아이템이라도 개발해야 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에 또 다시 조바심을 내기 시작한다.
하지만, 요즘 희미하게 깨닫는다. 그런 것들, 즉 뭔가 일탈과 일상 간의 경계는 내가 내 현실과 욕심을 잘 구분하지 못해 세워진 가벽이라는 것을. 그 경계를 두는 것 자체가 이미 내 안의 두려움에 항복한 것이다. 한국에서도 내 의욕과 에너지는 분출할 수 있고, 주변에 휘둘리지 않고 내 욕심껏, 의지대로 살아가는 방법과 tip은 다양하다는 것. 내가 세운 경계는 몸 담은 곳에서 내가 한 것을 밀어부치기엔 두렵고, 귀찮음의 증명이라는 것을.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여전히 여행을 지향한다. 일상에 금이 가고, 경력에 구멍이 생겨도, 장기 배낭여행을 계속 꿈꾼다. 한번으로 끝내는 것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반복하는 것. 왜냐하면 물리적으로 완벽한 자유를 실현하기에 혼자하는 배낭여행 만한 게 없기 때문이다. 이 세상 그 누구의 터치도 받지 않은, 세상에서 한번도 밟아보지 않은 땅을 밟는 느낌. 그 감정을 잊지 못하고 매일 그리워하기에. 나는 또 이렇게 다음 여행지에 대한 꿈을 키운다.
어쩌면 나는 그것 없이는 스스로 에너지를 만들지 못하는 미숙아인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