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이어리 6월 30일에 퇴사라고 쓰고 동그라미를 여러 번 쳤다.
(Image @Behance - Do Androids Dream of Finding New Work by James Hunt)
새로운 다이어리를 선물받자마자 한 일은 그것이었다. 얼른 6월 달을 찾아 넘겨 30일에 동그라미를 쳤다.
'퇴사'
무의식이 작용했었는지 연필로 흐릿하게 썼지만, 동그라미를 여러 번 치면서 다짐을 대뇌었었다.
'이 때에는 퇴사를 할 것이야'
프로 퇴사러라고 말하는 사람들의 이직 횟수를 보니 모두 나보다 적었다.
나의 이직 횟수는 11회이다. 지금 40대 초반이고, 대학원 졸업 후 26세부터 시작한 사회생활 동안 이직의 횟수이다. 그 사이 어학연수, 여행, 책 출간 등으로 생긴 공백을 제외하면 직장생활을 만 13년 정도 했으니 거의 1.2년에 한번씩 회사를 옮긴 셈이다.
그래서 이 곳에 왔을 때에는 신중했었다. 그런데, 옮긴 지 두 달만에 이 회사는 나갈 곳이라는 판단이 들었다. 다만 연간 프로젝트이다보니 책임감 하나로 지금까지 버텨왔다. 이제 만 2년을 향해 가고 있는 이 회사에서 더 미련을 부려야 하는지, 아니면 원래의 계획대로 나갈지를 주말마다 미친듯이 고민했었다.
그런데, 그 고민을 하다보니 무언가를 깨닫게 되었다.
지금 내가 결정해야 하는 것은 내가 이 회사에 몸을 담고 있느냐 마느냐가 아니라, 내가 이 회사에 다니지 않는다면 무엇을 할 것이냐 라는 점이라는 것이었다. 즉 지금 명함에 회사 이름을 지우면 내 이름 앞에 무엇을 적을 것인지. 직장인이 아니라면 무엇이 될 것인지가 더 중요한 결정이었다.
목적어와 서술어를 바꿔보았다.
'나는 이 회사를 그만둔다' 에서 '나는 무엇을 시작한다'
돈은 필요하니 그만 둔 상태로 계속 있을 수는 없다. 그렇다면 '회사를 그만둔다'와 '000을 시작한다' 라는 말은 연속성에 있는 셈이다. 내가 퇴사를 주저하는 건 순전히 '000'을 모르기 때문이다.
퇴사를 11번 한 나에게 12번의 퇴사는 아무 것도 아니다. 동료 선배와 농담처럼 하는 말로 '퇴사는 점심 메뉴 고르는 것'보다 쉬울 수 있다. 퇴사는 그냥 말하고 나오면 된다. (물론 잘 마무리하고 나오면 더 좋다. 그렇지만, 깽판치고 나온다고 해서 내가 사회에서 매장 당하는 것도 아니다. 사회가 그렇게 단순하게 연결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깽판치고 나가서도 뻔뻔하게 프리하면서 영업하는 사람 많이 봤다. 심지어 깽판을 당한 회사에서 아쉬우면 그 사람 찾기도 한다. 사람의 한두번 깽판으로 거래가 영원히 단절되고, 모든 사회가 그 사람에게 기회를 주지 않는 식으로 그렇게 단순하게 돌아가지는 않는다)
오전에 열심히 회의를 하다가도, 오후에 '나 내일부터 못나올 것 같아. 잘들 지내' 라고 말해도 어쩔 수 없는 거다. 그렇게 쉬운 퇴사 과정이지만 그것을 하지 못하는 건, 회사에 몸담은 것과 무관하게 내 삶은 계속 이어어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는 회사가 없는 내 삶을 무엇으로 채우고 싶은지 상상해 본 적이 별로 없다.
조직 생활이 내게 맞지 않는 것은 진작에 알고 있었기에, 이직 사이에 프리랜서를 고민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실제로 프리로 활동하는 사람들에게 연락하며 조언도 구하곤 했었다. 다들 성심성의껏 내 상황을 들어주고 자기 얘기를 해 주었지만, 실컷 면담을 한 뒤 난 또 입사를 하면서 그들의 관심과 나의 결심을 보기좋게 뭉개곤 했다. 그랬던 이유는 next가 희미했기 때문이었다. 수영의 존재를 모르는 이가 물 앞에서 뛰어들지 못하고 어찌하지 못하는 그 두려움. 그렇게 난 발목에 묶인 세상의 끈을 끊어버리지 못하고 어디로 가지 못하는 스스로를 한탄하고 있었다.
나이가 든 영향도 있을 거다. 40대 초반이 영글어진 지금, 나를 옥죄어오던 세상의 끈을 끊고도 서 있을 수 있다는 확신을 조금씩 만들고 있다. 어쩌면 계획되어 있었는지도 모른다. 직장생활은 나의 사회화를 위해 정규 교육 처럼 몇 년간은 꼭 경험해 봐야한다는 생각도 있었으니 말이다.
지금의 직장생활은 마지막이 될 것 같다. 그리고, 직장인이 아닌 그 무엇이 되기로 마음 먹었다. 이렇게 결심했지만, 그 시기는 아마 연말이 될 것 같다. 지금 하고 있는 프로젝트가 연말까지 이어지기 때문이다. 앞으로의 6개월은 몸과 마음이 분리된 꽤나 심난한 시기가 되겠지만, 직장인이 아닌 그 무엇이 되기 위해 구체적인 to do list를 나열하고 준비하는 과정으로 충분히 활용할 수 있는 시간이다.
가게를 오픈하거나, 내 이름의 회사를 차리는 식의 거창한 변화는 아닐 것 같다.
오히려 원래의 자리로 돌아가는 기분으로 자연스럽고 소란스럽지 않게 움직일 것 같다.
아이가 물을 만나 본능적으로 헤엄을 치는 것처럼 나 역시 본능적으로 잘 정착할 수 있기를 바래어 본다.
데이터 분석과 보고서를 쓰는 일은 계속 나의 주 무기가 될 것이다. 소속이 없어지고 명함이 없어져도 잘 해내기를 바래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