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내 랩탑의 글이 세상 밖으로 나올 때 거쳐야 할 고통들
그동안은 쉬웠다. 그냥 내가 만들면 되는 거였으니.
여행도 내 자유였고, 글을 쓰는 것도 내 안의 얘기거리를 나만의 문체로 풀어내면 되는 거였다.
혼자 놀아본 사람은 알지 않는가. 혼자 있을 때가 외롭지만 가장 편하다는 것을.
앞서 자기와의 싸움,,, 운운하며 여행기를 쓰는 고충을 열거했지만, 사실 세상이라는 수면위로 올리는 순간, 충돌과 스트레스는 이미 내 통제를 넘어서게 된다.
여기서 내가 말하고자 하는 충돌과 스트레스는 교정교열자, 편집자, 그리고 독자로서의 나 자신과의 그것을 말한다. 이미 아주 흔해진 독립출판이라면 편집자와의 충돌은 피할 수 없겠지만, '갈래'라는 출판사를 직접 차리기 전 난 거의 30 군데의 출판사에 투고를 했었다. 그 곳 중 한 곳과 계약도 되었고, 베테랑 편집자와 옥신각신하며 글 교정을 보았었다. 그러면서 내 원고는 무엇이 원본인지 거슬러 올라갈 수도 없을 정도로 빨간 볼펜, 파란 플러스 펜으로 난도질을 당했었다.
그렇게 2년간 그렇게 교정을 하다 출판사의 경제적 이유로 출간은 취소 되었고, 내 원고는 갈 길을 잃게 되었다. 아니, 사실 세상에 나온 적도 없으니 원래 있었던 그 폴더에 그대로 저장되어 있었다. 난도질은 페이퍼 상에서 진행되었기에 파일로 남아있지 않았다.
혼자 원고를 내기로 하고 회사를 그만 둔 뒤 가장 먼저 닥친 갈등은 파일로 얌전히 저장되어 있는 원고를 쓸지, 난도질 된 마지막 페이퍼 원고뭉치를 살릴지였다. 초고 파일은 (사실 초고라지만, 초고를 끝낸 뒤 자체 교정교열을 5~6회 정도 본 것이었고, 그 사이 잘려나가고 고쳐진 부분도 꽤 되었다) 거의 180 페이지에 이르렀다. 반대로 편집자와 나의 교정교열이 고스란히 담긴 원고 뭉치는 사진을 빼고 긁어 워드에 붙여보니 150 페이지였다. 편집자 의도에 따라 통째로 날라간 chapter도 있었고, 반대로 그의 글솜씨가 좋아 그대로 살린 문구도 남아 있었다. 마찬가지로 편집자와의 의견 충돌 덕분에 가다듬어진 내 문장도 더러 있었고, 사족 같은 문단은 과감히 삭제되어 있었다.
어떤 것이 정말 내 원고일까.
난 후자를 선택했다. 중간중간 눈에 띄는 편집자의 표현이 거슬리기는 했지만 그 과정 역시 난 글을 쓰고 있었다. '태초의 초고'라는 것은 애초에 의미가 없을 수도 있다. 그렇게 여러 손을 거친 (이미 편집자 2명, 교정교열자 2명, 내 지인들의 문법 교정교열 등등) 원고를 선택함으로써 그간의 과정에 의미를 두고 싶었다.
편집자와 논쟁한 시간은 헛된 게 아니었다. 무엇보다 책은 적어도 돈을 받고 '파는 책'은 자위적인 예술을 넘어 타인을 의식해야 한다. 그래서 타인의 시선과 의견을 감안하는 것은 중요할 것이다.
이런 얘기를 하면 간혹 '그럼 독자의 시선에 맞추라는 거야?', '작가정신을 버리라는거야?' 라고 성급하게 달려드는 사람이 있다. 물론 대꾸하고 싶지 않지만, 소극적으로나마 의문이 드는 이들이 있을 것이다.
그런 얘기는 아니다. 이미 150 ~180 되는 워드 페이지에 몇 줄, 몇 단락 바꾼다고 작가 정신이나 주제가 훼손되지 않는다. 물론 이런 과정은 일방적이어서는 안된다. 나도 수긍하고, 내가 상대방을 설득하고 해야 한다.
그런, 과정을 거치지 않은 책은 정말 자위적이다. 심지어 독립출판물에서도 그런 게 느껴지는 책이 있고, 그런게 안느껴지는 책이 있다. 후자라면 냉철한 자체 검열을 한 것일테다. 누군가의 주머니에서 적게는 6천원, 많게는 2만원 가까이 되는 돈을 꺼내게 하는 건 힘든 일이다. 왜냐면 구매자는 그 돈으로 더 많은 것을 할 수 있기 때문에. 내가 무가지로 세상에 뿌리지 않는다면, '돈을 받고 판매'를 할 것이라면 적정한 타인의 검열, 그리고 무엇보다 자기만의 검열이 있어야 한다.
책을 쓰는 과정은 도취의 과정이다. 자기만의 감정, 경험, 기억에 푹 빠져 그냥 써지는 대로 쓰면 되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오바도 있을 수 있고, 오류도 나올 수 있다. 그걸 검열하고 교정하는 것이 세상에 내 놓는 최소한의 예의이다. (사실 우리도 밖에 나갈 때 잠옷바람으로 나가진 않지 않는가)
'쿠바 다이어리'를 들춰보면 편집자가 고친 문장은 기가 막히게 눈에 들어온다. 헌데 볼 때마다 기분이 다르다. 어떨 때는 질투가 날 정도로 잘 고쳤고, 어떨 때는 내 문체가 아닌 것 같아 어색하다. 그런 껄끄러운 느낌을 가지고 뒷장을 넘기면 내가 주장하고 설득해서 고수한 문장이 튀어나온다. 그러면 다시 안심이다. 그렇게 타인과의 교감이 넘나드는 원고여서 난, 이 책이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