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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elly KyuHyang Lim Nov 26. 2015

비와 포도 예찬

#3 가을비가  오는 제주도의  포도호텔 , 이타미 준의 건축


며칠째 그런 날들이  계속되고  있었다.
비 냄새에 흠뻑 취해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는 상태  




궁극의 영역을 연상 시키는 안개낀 도로.




 발 밑의 제주의 돌들도 조금씩 비에 젖어 채도가  짙어졌다.  도로도 지붕도 사람도 모든 것이 비를 있는 힘껏 흡수하고  있다. 세차던 비는 안개비가 되었다가  또다시 쏟아부었다가 하는 정도의 차이는 있었지만 이곳의 비는 영원히 내릴 것만   같다..




비가 오면 세상의 색깔이 한 톤  낮아진다.

내 눈을 혹사시키던  화려함 들이

빗물에 영 풀이 죽어 있는 것을 보고 있자면

내 마음도 한 톤  차분해진다.

비 오는 날에 대해 말할 때

내가 목소리를 꼭 한 톤 올려서 이야기하는 부분이다.  






제주도 서귀포시 비오토피아 안의  포도호텔. 이곳의 객실은 단 26개로 한정적이어서 예약이 힘든 곳이지만 이렇게 비가 내리는 날 누가 제주도에  오겠어? 해도 남은 객실이 단  하나뿐이었다.



레스토랑에서 바라본 창가 . 포도송이중 하나가보인다.


비가 카메라에 잘 담겼다



체크인을 하고 잠깐 기다리는 동안 호텔 안에서 식사를 했다. 순간 비가 억수같이  쏟아졌다.

메뉴는 새우튀김 가락국수 정식과  함박 스테이크.

창밖이 비로 가득 찬 진풍경을 감상하며 식사를 할 수 있다니.  바라보고 있는 것 외엔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는 내 눈마저 씻겨 내려 가는 듯 시원하다.




자연을 담은 캐스케이드에도 비가 내렸다. 천정이 뚫려 있어 실내에서 바깥을 경험한다.





식사를 마치고 벨보이의 안내에 따라 객실로 들어가는 복도를 지나가는데 달콤한 포토 향이 코끝을 살짝 스친다. 딸기도 바나나도 아닌 포도향이 의미하는 바는 대체  무엇일까?

온 복도에 퍼진 이 달콤한 향기가 포도라는 사실은  "포도호텔"이라는 이름에서 나온 나의 무의식적 연상 단어 일  뿐일까? 혹은 정식으로 포도향이 이라 불리는 향을  가져다  쓴 것일까?





건축물을 망칠 수 있는 큰 간판대신 소박한 팻말로도 충분하다



어떤 각도로 보아도 한 폭의 그림만 같은, 오로지 제주 만을 위해 태어난 듯한 이곳은 재미건축가 이타미 준(Itami Jun, 유동룡)에 의해 설계된 호텔이다. 하늘에서 보면 그 모양이 포도 같다고 해서 간단하게도 포도호텔이라는 이름이 부여된 것이다.


여기서 우리에게 품격 있는 삶을 제공해 주겠다며 TV 스타를 앞세운 , 외우기도 힘든 괴상스러운 브랜드 아파트 이름을 몇 개 떠올려보자.


그와 비교해보면   포도호텔이라는 놀라운 단순함이 주는 진솔한 본질 , 화려하지 않은 대신 수려함 에서 나오는 고급이 이속에서  어떤 이야기를 담고 있을지 예상되지 않는가.   





아무 것도하지 않고 누워 빗소리만 들어도 가득 찰 것 같은 하루



럭셔리 보다는 단아한 고급에 가까운 이 특급호텔은 사람을 진정 유쾌하게 만드는 소소한 것들로 넘쳐난다.  호텔이라는 공간에서 처음 경험해 보는 동양적 미에 정신을 빼앗겨 요리조리 탐구 하기  시작할 때 즈음 벨이 울린다.




웰컴 과일입니다"




과일 마저 소소하다. 찻잔은 기분을 더 한다.




한국에 살면서도 서구적 생활 방식에 익숙해진 나는 역 문화충격을 받았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좌식으로  앉는다는 것이 이렇게 안락한 낭만을 제공할 줄이야.  아무리 높이 앉아도 하늘에 닿을 것 같지는 않지만 바닥에서는 이렇게  흙냄새에  가까워질 수 있다.


더 거세진 쏟아지는 비를 감상하며 전통 찻잔에 둥굴레차를 끓여 잠시 감상에 젖고는 스스로 분위기를 내어본다.



빗소리를 그 어느 때 보다 또렷이 경험할 수 있었다.

여기는 진정 비를 위한 공간이  아닐까

아니래도  좋다.

나는 내 인생 일대 최고의 비 내리는 날을 즐기고 있다.




      어매니티는 공간과는 상이하게 꽤 고급 코스메틱 브랜드인 록시땅. 장식보다는 본질.





오늘날의 우리는 눈에 띄는 화려함을  숭배한다. 그것이 주는 단편적인 행복에 물들어 있고 또 우리의 삶을 풍성하게 만들어준다고 믿는다. 소유나 소비의 기호도 고급을 휘두른 저급이 대다수며 비싼 돈을 지불한 물질이 자신의 가치를 높여 줄 것이라는 원초적인 착각에 빠지기도  한다. 맹목적인 미를 향한 추구는 언젠가 한계가 있다.  드러나지 않은 진정한 본질의 미를  알게 되기 전까지는 영원히 그 속에서 질식할 것이다.


이곳의 정갈함 속 세련됨은 화장을 하고 예쁜 스카프를 하고 최신 유행이라 자부하는 롱 바바리를 입고 온 나를 한없이 작아지게  만드는 그런 조용하지만 단호한 힘을 지니고 있었다.





와인을 곁들인 저녁은 푸짐하다



반신욕. 버니니. 하루키



나는 어른이 되고 난 이후  비 에 관해서 이상한 감정을 느끼기  시작했다. 내 게으름과 여유 부림에 대한 큰 변명이 되어주었기  때문이다.   가령 커피, 멍 때리기, 늦잠과 같은  부질없는 것을 꼭 할 일 을제쳐두고서라도 해야 할 이유였다.



편백나무 욕조에서    "아라고나이트"라는 온천수에 몇 시간째 굳었던 몸과 경직된 마음을 놓아본다. 객실에서 홀로 즐기는  온천이라니. 나의 게으름에 입각한 여유 부림은 비와 제주도라는 명제 하에 모든 것이 허락되기에 충분하지 않은가.





포도 한송이가 보이는 포도 조찬. 수란과 명란젓이 인상적이였다.



다음날 졸린 눈으로 조식이 아닌 조찬을 맞이했다.

내겐 호사스럽지만 요란하지 않은 정갈한 그릇에 담긴 소박한 메뉴이다. 절제된 양과 최고급 식재료로 만들어진 양질의 반찬들은  각종 음식 과잉의 잔치인 고급 뷔페 보다도 만족스러웠다.  






복도를 지날 때마다 이타미 준이 녹여놓은 다양한 공간의 해석들이 존재한다.

드문드문 자연 채광이 들어오는 작은 창 들을  발견하게 되는데 앞에 무심하게 놓인 사물과 기가 막힌 공간감을  이룬다.


어떤  개념미술처럼 , 그냥 지나치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각자의  관점으로부터  다양하게 해석되어질 것이다.


이런 종류의 발견이 몇 개나 되는데 숨겨진 보물을 찾는 것처럼 매 순간 경이의 감정이 솟는다.



제주7대 건축물에 속하는 포도호텔




체크아웃을 하자 컨시어지는 늘 그랬듯 편안한 미소를 머금고 작은 선물을  내게 건넸다. 이곳 호텔의 사람들의 여유로운 미소는 그들이 일하는 공간을 닮아있었다. 온천수를 담은  미스트인데 유통기한이  단 1주 일이라고 한다.


나는 그 안에서  왠지 포도향이 날 거라는 직감을 했다.


이곳에 머무는 동안 나를 감싸던 여유의 향기가 채 날아가기 전에 이 미스트를 뿌려주면 다시 기억이  재생될 것만  같다.  그래서 일주일의 유통기한은 너무 짧다.





포도+향



안녕 124




떠나는 날은 비가 무척 조용히 내렸다.




가을 끝자락의 이 비는

모든 것을 흠뻑 적실 때 까지  

이렇게 하염없이 내린다.









                                                   LUV contemporary art

                                                       갤러리스트 임규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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