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안다.' vs. '이해한다.'

“내가 당신에 대해 잘 아는데 장점은 말을 잘하고 끈기가 있어. 근데 단점이 있어. 단점은 더 열심히 일하지 않는 거야. 좀 열심히 해봐. “ 

우리 주변에 나를 위하는 사람, 즉 내 친구, 부모, 상사 그리고 직장 선배들이 이야기 하다가 나에 대해 충고하기 위해 하는 말은 위와 같다. 그들은 나를 잘 아는 사람들이다. 이런 이야기도 들었다. 


“자네는 일 시작을 잘하는데 마무리를 잘 못해. 클로징을 잘 해야 진짜 일을 잘하는 것이지”  

자기 계발서나 자기 계발관련 유투브 같은 것을 보면 이런 말을 들어도 감사의 마음으로 새겨 듣고 받아들이라고 한다. 이론적으로는 그렇다. 필자도 그런 마음으로 살았다. 어른들이 주는 조언이니 발전적 피드백으로 듣고 새겨야지 라는 생각을 한다. 그런데 생각만 그럴 뿐, 현실적으로는 감정이 상한다. 반발심이 든다. 그래서 당신은 잘하는지? 라고 되묻고 싶어 진다. 아니면 날 도와 주었는지?라고도 묻고 싶다. 또한 나에 대해 누군가 변명해 주었으면 싶다. 또는 상황 탓을 하고 싶어진다. 그 환경에서는 어쩔 수 없었어요 라고. 



안다. vs. 이해한다  


우리가 누군가를 “안다”라는 말을 했을 때 우리가 쓰는 언어는 대부분 판단의 언어이다. 판단의 언어에는 해석이 들어 있다. 주말에 텔레비전을 보고 쉬는 딸을 보고 손발은 부지런히 놀려야 한다는 철학이 있는 어머니에게는 놀고 있다는 해석과 게으르다는 판단이 생긴다. 오후 다섯시라도 일이 주어졌으면 야근을 해서라도 끝내야 한다는 상사에게 6시에 퇴근하는 부하 직원은 맡은 일을 다하지 않았다는 해석과 책임감이 없다 라는 판단이 생길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이 반복되면 그 사람에 대해 우리는 “안다”라는 말로 자신의 주관적인 잣대로 생긴 해석과 판단을 하곤 한다. 

해석과 판단의 말을 감정이 섞여 상대에게 하게 되면 불만의 언어가 되고 부정언어가 되며 꾸중의 언어가 된다. 우리는 이런 잣대를 들이대면서 상대를 “안다”라고 생각한다.   

상대를 “안다” 라는 것이 아니라 상태를 “이해한다”라는 말을 쓸 때는 우리는 어떤 언어를 쓰는가? 오후 다섯시라도 일이 주어졌으면 야근을 해서라도 끝내야 한다는 상사가 6시에 퇴근하는 부하 직원을 보면서 이런 호기심이 들 수 있다. 어! 나와 다르군. 그는 나와 어떻게 다를까? 오늘 일터에서의 우선 순위를 다했나 보구나. 사생활의 우선 순위는 무엇일까? 

어떤 사람은 추가로 일할 목록을 만들면서(#성취테마) 실행을 하고 어떤 이는 삶의 규칙을 정하여 지킴으로써(#체계테마) 실행을 한다. 

필자에게 “열심히 하지 않아. 더 열심히 해봐. 추가로 더 해봐” 라고 주문하는 상사나 부모님이 이 말 대신 “네가 힘들겠구나. 내가 무얼 도와 주면 좋겠니? 또는 내가 추가로 해 줄만한 것은 무엇이니?” 라고 물어 준다면 아마 필자는 이렇게 답했을 것이다. “제가 할께요. 제가 더 열심히 해볼께요” 

누군가 그를 이해해 준다면 이해하는 언어는 다르다. 굳이 공감의 스킬이 없어도 된다. 누군가를 이해할 때는 본인의 강점으로 상대에게 기여하려는 태도를 견지한다. 내가 추가로 해줄께요 (#성취테마). 마음이 아프네요(#공감테마). 앞으로 좋은 일이 생길거예요(#미래지향테마). 문제를 해결해 드릴께요(#복구테마



저항한다 vs. 수용한다.  


나를 이해해 주는 사람을 만나면 힘이 생긴다. 앞으로 걷다가 꼬꾸라져도 다시 일어날 힘이 생긴다. 힘들어 넘어져 있는 사람에게 넘어진 이유에 대해 말해 주지 않아도 된다. 넘어진 사람에게는 일어날 힘이 필요할 뿐이다. “안다”라는 상태에서 누군가에게 아는 척하지 말고 “이해한다”라는 노력을 우리는 얼마나 하는가? 

누군가를 이해해 준다면 이해 받은 그 사람은 일단 힘이 생긴다. 진흙탕에서 일어날 수 있는 힘! 그리고 아마 또 진흙탕을 만나면 넘어질 것이다. 한번의 연습으로 나의 반복적인 패턴이 바뀌기는 힘들기 때문이다. 계속 넘어지다 보면 이런 생각이 든다. 이번에는 안 넘어지기 위해서 난 미리 무엇을 준비해야 할까? 내가 넘어 졌던 이유는 무엇일까? 내가 변해야 하는 부분이 있다면 그것은 무엇일까? 이런 생각을 한다면 그는 자신의 변화를 만들려는 노력을 하게 된다. 그러면 당사자는 “저항한다”에서 “수용한다”로 전환된다. 자신을 이해 받은 이로부터 받은 감정적 동기 부여가 그로부터 성장하려는 노력을 하게 하는 것이다.   



멘토는 나를 이해해 주고 내가 수용하도록 돕는 사람 


“그 사람 안 변해. 사람은 변하지 않아” 이런 말을 

누군가 할 때는 대부분 네거티브의 의미를 담는다. 필자는 그 말을 들을 때마다 이렇게 말하고 싶었다. “사람의 본성은 변하지 않아요. 하지만 누구나 성장의 잠재력이 있어요. 그 사람이 원하면 말이지요”  

세상은 계속 변한다. 사람도 계속 변한다. 아니 성장한다. 내가 오늘 만난 그 사람이 몇 년 후에도 같은 모습일 거라고 판단하지 말자. 나한테 비정했던 사람이 후회하고 나에게 더 잘해 줄 수도 있고 나에게 잘해 주었던 그 상사가 어느 날 꼰대가 되어있을 수도 있다.  

나는 어떤 사람이 되어 있을까? 계속 성장하는 사람이 되어야 겠다. 그 시대가 요구하는 것들을 “알아”라고 말하지 말고 “이해하고 수용하여” 내 것으로 만드는 사람말이다. 

필자에게는 비즈니스를 시작하면서 삼 주에 한 번 정식으로 뵙는 멘토님이 계신다.  

내 주위의 사람들이 “안다”라는 말로 힘들게 할 때 이해한다는 말씀으로 도움을 주셨던 분이다. 경험에서 우러나온 진솔한 조언과 나를 이해해 주는 따뜻함이 어우러져 나에게 늘 힘을 주는 소중한 시간이 되었다. 

인생은 뷔페와 비슷하다고 누군가 말했다. 너무나 많은 음식이 사방에 있는데 내가 어떤 음식을 선택하고 접시에 담느냐는 나의 문제이다. 결정을 못해서 그냥 서있을 수도 없고 아무거나 막 접시에 올릴 수도 없다. 그래서 미리 그 여정을 해 본사람들의 지혜로운 조언을 받을 때 우리는 나에게 맞는 훌륭한 선택을 할 수 있는 것 같다. 

내가 디저트부터 먹고 있는 것은 아닌지 맛있어 보인다고 한 가지만 고집하고 먹고 있는 건 아닌지 일러줄 수 있는 지혜는 삶에서의 경험과 사람에 대한 이해에서 나온다.  

인생의 멘토, 커리어의 멘토 혹은 친구 같은 멘토, 내 주위의 멘토들이 얼마나 있을까? 많아도 좋고 한 명 이어도 좋다. 그리고 나도 누군가의 멘토가 되어 주자. 삶을 조금 더 풍요롭게 만든다고 자신한다.


이 글은 “Stay Contemporary 동시대 인으로 살기”를 삶의 철학으로 삼고 지난 2년간 필자의 멘토가 되어 주신 빈센트님께 진실한 감사의 인사를 전하며 바친다.  


“멘토님으로 계셔 주셔서 참 감사합니다. 빈센트님.”

작가의 이전글 강점(Strengths)은 재능(Talent)으로부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