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명의 고리
딩동.
페이스북에 메시지가 왔다.
<안녕하세요. 13년도 UQ한인 연구자 모임 회장을 맡게 된 김재희입니다. UQ한인 연구자 모임은 UQ에서 공부하고 있는 석, 박사들의 연구 교류와 친목을 위해 설립되었으며 올해 첫 모임은 2월 셋째 주 토요일 6:00에 시티 한식당입니다. 많은 참여 부탁드리고 그날 뵙기를 고대하겠습니다.>
이게 누구지? 내가 이번에 학기 시작하는지 어떻게 알고 연락이 온 거지? 모르는 사람의 메시지에 고개를 갸우뚱하며 희영 언니에게 달려갔다.
-언니, 언니, 무슨 연구자 모임 회장 메시지 받았어?
-응! 안 그래도 물어보려고 했다. 너 갈 거야?
-몰라, 나는 이런 거 별로 안 좋아하는데.. 아는 사람들도 아니고.
-그치? 나도 좀 그렇더라. 그래도 가면 같은 분야 공부하는 사람도 있을 수도 있고 나쁘진 않을 거 같은데?
-그럼 한번 가볼까? 언니 간다면 나두 가고.
-웅! 생각해 보자고!
딱히 가고 싶은 맘이 들진 않았지만, 슬쩍 호기심이 드는 것도 사실이었다. 먼저 공부를 시작해 박사까지 하고 있는 선배들의 얘기를 들으면 도움이 많이 될 것도 같았고, 한편으론 저런 모임은 주로 음주가무로 시작해 음주가무로 끝나는 경우를 많이 봐 왔기 때문에 별 기대가 되지 않기도 했다.
시간이 지나 그 날이 왔고, 그 날까지도 언니랑 나는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다 결국 마지막 순간이 되어서야 가기로 결정을 하고 시티로 나섰다.
약속 장소인 식당은 4층에 있었는데, 1층에서 회장이라는 사람이 서글서글하게 우리를 맞아주었고, 약 20여 명이 모인 채로 식당으로 함께 올라갔다. 회장의 지시 하에 테이블을 이리저리 붙이고 어찌 앉고 나니까 어색함이 감돌기 시작했다.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옆 자리 사람들에게 인사를 하며 언니랑 주변만 두리번거리며 눈알을 굴리고 있고, 다른 사람들은 열심히 메뉴판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사람들 중 몇몇은 이미 서로 아는 사이인 듯했고, 이거 시키자, 저거 시키자며 이것저것 고르고 있었다. 나도 곁눈질로 열심히 메뉴를 훑고 있는데, 갑자기 회장이 벌떡 일어나더니,
-자, 괜히 여러 종류 시키면 늦게 나오기만 하니까 곱창전골로 통일합시다! 이의 있는 사람?
이라고 외치는 게 아닌가.
당연히 굳이 싫다고 나서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나는 굉장히 기분이 나빠졌다.
누구나 좋아하는 김치찌개도 아니고 곱창전골을 통일해서 다 시킨다니, 내가 곱창을 싫어하기 때문도 있지만, 이 말도 안 되는 의사결정 과정이 너무 당황스러웠고 어이가 없었다. 뭐 먹을까 하는 행복한 고민을 하고 있었는데...
'뭐 저런 사람이 다 있어?'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저런 막무가내인 사람은 도대체 뭔가 하고 테이블 저 끝 상석에 앉은 회장을 보니 머리는 파마를 했는지 원래 곱슬머리인지 제멋대로 길어서 구불구불거리고, 키 크고 마른 체형의 남자였다. 이미 술을 몇 잔 하고 왔는지 얼굴은 시뻘겋게 달아올라있었다. 히피 같다, 는 게 첫 느낌이었다.
'뭐하는 누군지 모르겠지만... 하는 행동이 정말 비호감이네. 지가 회장이라 이거지?'
먹지도 않는 곱창전골을 기다리며 반찬만 깨작거리다가 괜히 왔다는 생각을 수도 없이 했다. 슬쩍 쳐다보니 희영 언니도 딱히 재밌어하는 것 같지도 않았다.
내 바로 오른쪽에는 박사과정을 하고 있다고 자기를 소개하던 한 남자가 앉아있었는데, 내 또래 아니면 한두 살 많게 보였다. 그분은 구불머리 회장이랑 친분이 있는지 둘이 한참 떠들더니, 옆자리에 앉은 나한테도 인사를 하면서 생물학을 공부하고 있다며 내가 뭘 공부하는지 물어보았다.
-안녕하세요. 저는 응용언어학 전공입니다.
-언어학? 오~ 여기 언어학 박사 하는 사람 있는데!!! 저 왼쪽에 단발머리 언니 보이죠? 저분이 언어학으로 박사하고 있어요! 나중에 물어봐요!!
나는 박사 공부까지 생각하고 있었던 터라, 그걸 듣자마자 단박에 호감이 생겼다.
-와 정말요? 너무 잘됐어요.
그러고 그 오빠랑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는데, 그 오빠는 단정한 옷차림에, 말도 조곤조곤 잘하고 매너도 좋아서 나도 질문을 해 가며 계속 이야기를 이어가게 되었다.
-그러면, 생물학 중에서도 어떤 쪽으로 연구하시는 거예요?
-아 어차피 말해봤자 복잡하고 재미도 없어요 ㅋㅋ 그냥... 유전자 쪽이라고만 할게요.
-아... 그 분야는 잘은 모르지만 리처드 도킨스 책 '이기적 유전자' 읽어봤어요. 그런 비슷한 건가 보죠?
-오!! 그러면 잘 모르는 게 아닌걸요!!! 리처드 도킨스 좋아하세요?
-네!! 그 작가 책 정말 많이 읽었어요. 최근에는 '만들어진 신'을 되게 감명 깊게 읽었어요.
-그것도 알죠. 무신론에 관한 책이잖아요? 나도 재밌게 봤어요.
마침 둘 다 최근에 읽은 책이어서, 무신론과 리처드 도킨스에 대해 한참이나 이야기를 했다. 지금은 잘 모르겠다고 생각하지만 그때만 해도 나는 무신론자였고 그런 이야기를 하는 것을 아주 좋아했다. 이야기를 하다 보니 자꾸 종교 쪽으로 흘러갔고, 교회에 대한 비판도 은근히 곁들이면서 오랜만에 아주 신나게 말이 통하는 사람을 만나 이야기를 할 수 있었다.
그러다가 곱창전골이 나왔고, 다 같이 수저를 들어 식사를 하려고 할 때, 그 오빠가 저 멀리 상석에 앉아 있는 구불머리 회장을 가리키면서, 당황스런 말을 했다.
-저 분이 우리 교회 장로님이에요. 다음에 우리 교회 한번 놀러와요! 켈리씨 다들 좋아하겠다.
들던 수저를 탁 놓고 싶게 만드는 발언이었다.
상석에 앉아 있던 구불머리 회장은 그 짧은 시간에 술을 얼마나 많이 마셨는지 얼굴은 전보다 훨씬 시뻘겋게 달아오른 채, 그 테이블의 언니들과 식당이 떠나가라 굉장히 크게 웃고 떠들고 있었다.
내가 방금까지 신랄하게 교회 비판을 하고 내 자신이 무신론자라고 떠들어댔는데, 나보고 교회에 나오라고...? 지금 제일 큰 소리로 술 올라서 떠들고 있는, 얼굴 시뻘건 저 회장이라는 사람이 장로라고? 이건 또 무슨 사이비인가.
'우리' 교회 장로라니까.... 이 생물학 한다는 분도 그 사이비에 다니나 보지?
그러면 그렇지. 역시 이런 모임은 목적이 없을 수가 없어. 순진하게 온 내가 바보지. 얼른 달아나야겠다. 배가 고팠기에 맨밥만 열심히 먹기 시작했다. 얼른 먹어야 집에 갈 수 있을 것 같았다.
예측 못한 이야기지만, 그 구불머리 회장과 나는 훗날 결혼을 하게 된다.
만약 그 날 미래에서 온 예언자가 내 귀에 대고 <너 저 구불머리 회장이랑 몇 년 뒤에 결혼해>라는 소리를 했으면 나는 그 일을 피하기 위해 그날로 짐을 싸서 100%의 확률로 한국으로 돌아갔을 것 같다.
얼굴 시뻘건 구불머리 회장이라니....내 남편이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