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황 백만개
어색했던 저녁 식사 시간도 거의 끝나가고 있었다.
'빨리 집으로 도망가야지'
희영 언니한테 슬쩍, 갈까? 하는 눈치를 보내니 언니도 기다렸다는 듯 얼른 가자고 해 잘됐다, 싶었다.
얼른 자리를 뜨고 싶었지만 계산을 해야하는게 아닌가 싶어서 자리를 못 뜨고 꾸물거리고 있었는데, 구불머리 회장이 계산 후 영수증을 받아오더니 열심히 계산기를 두드리기 시작했다.
허 참....
본인 맘대로 메뉴를 통일할 거면 본인이 돈을 내던지. 사줄 것도 아니면서 자기 멋대로 곱창전골로 시키다니 ... 여러모로 굉장히 괘씸한 자였다.
모두에게 $20씩 내면 된다며 돈을 걷으러 다니는데, 술도 마시지 않았는데다 곱창전골도 먹지 않았어서 결국 반찬이랑 맨밥만 먹고 2만원 가까이 되는 큰 돈을 내야하는 가난한 유학생의 마음은 쓰라리기 짝이 없었다. 이 $20이면.. 내가 점심으로 자주 때우는 서브웨이 샌드위치가 4개인데...
생각할수록 못마땅하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게다가 교회 다닌다면서... 장로라면서?.... 그런데도 술을 쭉쭉 들이붓고 마셔대는게 거의 100% 사이비 종교 각인데...
문득 어디서 사이비 종교는 사람들을 끌어다가 결국 돈을 쓰게 만든다는 걸 들은 생각이 나서 내가 딱 그 꼴이로구나 싶었다.
모인 사람들은 슬슬 2차를 어디 갈지 논의하기 시작했다. 식당이 4층이어서 웅성웅성 다들 1층으로 내려와서 2차에 대한 이야기가 계속될 때 나랑 희영언니는 얼른 눈치를 보다가 먼저 가보겠다고 인사를 했다.
-저.. 저희 먼저 가보려고요.
-어? 먼저 가시게요? 네.. 들어가세요.
순순히 보내줘서 정말 다행이다 하며 슬슬 뒷걸음질 치는데 갑자기 저 멀리서 사람들이랑 크게 떠들고 있던 구불머리 회장이 머리털을 날리면서 뛰어왔다.
-아니! 아니! 두 분 어디가요! 나 두 분이랑 아직 한 마디도 못 했는데!!!
-아..저희가... 일이 있어서 가봐야 해서요....
-아니! 어떡하나? 저는 오늘 오신 분들 다 아는 사람이에요. 진짜 두 분만 완전 처음 뵙는건데.. 인사도 못하고 그렇게 가시면 안되는데....
-죄송합니다. 저희가 일이 있어서요... 다음에 학교에서 뵈요.
-아 그럼 학교에서 꼭 보는 거에요!!! 너무 아쉽다 진짜!!
역시... 못 가게 잡는 걸 보니 더더욱 뭔가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
언니랑 집에 돌아와서는 아 진짜 괜히 갔다며 한참 수다를 떨다가 잠이 들었다.
그렇게 학기는 시작되고, 새 학기를 맞은 학교는 학생들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강의실에도 자리 잡기 전쟁이 펼쳐졌고, 카페, 식당, 서점 어디 하나 학생들로 북적 북적, 단 한 곳도 조용한 곳이 없었다.
그 중 내가 가장 좋아하는 곳은 롤리샵 (젤리, 사탕, 초콜릿 등을 무게 달아서 파는 곳)이었는데, 거의 매일 롤리샵에 들러서 젤리와 초콜릿을 조금 사서, 쉬는 시간마다 먹으면서 당 보충을 하는게 학교 다니는 최고의 재미였다.
흔한 호주의 롤리샵
그날도 롤리샵에서 오늘은 어떤 젤리를 살까 동전을 짤랑이며 가고 있는데, 저 멀리 어디서 본 듯한 사람이 걸어오고 있었다.
어디서 본 사람인데... 누구지? 하면서 쳐다보는데, 걸어오는 두 사람은 바로 구불머리 회장과 내 옆자리에 앉아 교회 나오라고 권유하던 안 박사였다.
헐...
구불머리 회장은 여전히 다 떨어져가는 청바지에 헐렁한 티셔츠를 펄럭이며 반테 안경을 쓰고 히피처럼 건들거리고 있었고, 안 박사는 그날같이 단정하고 깔끔하게 입고 있었는데, 둘 다 주변을 두리번 두리번거리며 걸어다니는 게 꼭 길거리에서 2인조로 다니면서 사람들을 데려가 제사 지내게 해서 돈을 뜯어내는 '도를 아십니까'의 그 사람들 같이 보였다.
나는 젤리 사는것도 잊은 채 황급히 나무 뒤로 몸을 숨겼고, 회장과 안 박사는 롤리샵으로 들어가 이것 저것 사는 것 같았다. 멀리서 지켜보다 그 2인조가 롤리샵을 떠나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안심하고 가게로 들어가서 젤리를 사기 시작했다.
'어휴.. 하마터면 마주칠 뻔 했네. 박사 한다는 사람들이 공부는 안하고 왜 저렇게 돌아다니는 건지 알 수가 없다. 공부 안하고 노는 것만 봐도 뻔하다 뻔해!'
이것 저것 젤리를 고르고 계산대로 향하려는 그 순간이었다.
누군가 내 뒤에서,
-어? 켈리씨?
하는 소리가 들렸다.
설마... 설마..... 하며 돌아본 자리엔,
구불 회장과 안 박사가 함박미소를 지으며 서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