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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elvinstyle Jan 15. 2024

선생 리더십

회사문화 답사기 6

89년 겨울

삼성전자 경력 공채로 정보통신부문 OA사업부 소속 영업직에 배치가 되었다. 역삼동 대로변에 자리 잡은 사무실엔 부장님 한 분, 과장님 두 분, 대리 두 분, 사원 여섯 명이 한 부서원이었다.


나는 1과 소속으로 과장님은 점잖고 말수가 적었고 보고서 작성의 달인이셨다. 당시는 수기로 보고서를 작성하던 시절이어서 펜글씨를 잘 써야 했는데 내 팀의 과장님은 펜글씨 교본에서 튀어나온 듯 가지런하고 힘 있는 서체로 보고서를 써 내려갔다.


시장조사 보고서나 경쟁사 동향 보고서를 작성할 때면

신문기사, 대리점에서 들어온 정보, 동종업계 선후배들과 주고받은 정보들을 모아서 분석하고 핵심내용을 정리한 후에 보고서에 담을 내용을 다시 기획하고 정리해 나가셨다.


그 과정을 옆에서 보는 것만으로도 공부가 되었다.


첫 직장에서 세일즈 할 때는 상품지식 공부와 상담화법 교육, 방문 전 준비사항 및 방문 시 영업 프로세스, 방문 이후 고객등급 구분과 방문 주기 결정 등과 같은 세일즈 파이프라인을 중심으로 한 세일즈 프로세스에 집중하였는데 회사를 옮겨 보니 삼성전자 영업에서는 제일 먼저 시장의 규모, 경쟁사 동향 등을 분석하고 이에 따른 영업채널 구축과 채널별 세일즈 전략들을 따로 수립 후 영업활동으로 전개하고 있었다.


대기업이라 영업의 방법도 다르다고 느꼈다.


부장님은 항상 자리를 지키고 앉아계셨는데 쉬지 않고 무언가를 보고 쓰고 계셨다. 당시 우리 부서는 수원에 있는 제조본부와 직접 업무를 주고받는 시스템이어서 판매하는 제품의 생산일정, 수요예측, 주문과 출하현황, 재고현황, 신제품 론칭 관련 논의 등을 부장님 중심으로 진행되고 있었기에 부장님은 자리를 비울 수 없으셨던 거였다.


부장님은  빈 틈이 없으셨고, 일을 잘 배분하여 과장님께, 대리님께 지시하신 후 보고를 받으시곤 했다. 성품은 조용하고 인자하셨고 항상 부하 직원들에게 존댓말을 하셨다.


대기업이라 역시 부장님도 인성이 좋으시구나 했다.


전 직장 상사분들은 모두 반말을 사용하셨다. 좀 더 편안한 관계를 위함이셨겠지만 두 가지 모두 경험한 나는 아랫사람에게 존대를 사용하는 모습이 좀 더 좋게 느껴졌다.


그런 인자하신 부장님이 화를 내실 때가 있었다. 과장님이나 대리님이 업무보고를 할 때 무언가 부족하거나 실수가 발견되면 이런 말로 화를 내셨다.


"선생!

이 보고내용에 핵심이 없네요. 다시 정리해 오세요."


'선생!'


이 단어는 부장님이 화를 낼 때 상대방을 지적하는 가장 큰 욕이자 부장님의 심경이 불편하다는 표현이었다. 직원들은 사무실에서 '선생'이라는 단어가 몇 번 나오는지 부장님과 대면한 과장님이나 대리님의 표정을 살피곤 했다.


회사에서 리더가 '선생'이라고 호칭하면서 화를 내는 것은 생경한 장면이었으나 부장님의 '선생' 호칭 한 마디는 단호했고 부하 직원의 자존심에 상처를 주지 않으면서도 적절한 주의를 환기시키는 현명한 설루션이었다.


사실 그 시절 대부분의 리더들은 화가 나면 육두문자에 삿대질에 심하면 발길질까지 하던 시대였기에 우리 부장님의 화내는 방법은 실수한 부하직원들이 스스로 깨우침을 가지라고 격려해 주는 응원의 메시지가 되었다.


나는 사원이어서 부장님께 직접 보고할 사안도 없었다. 입사 한 달쯤 후에 부장님이 나에게 임무를 주셨다. 당시는 삼성전자에서 복사기 판매사업을 시작한 시기여서 제품 라인업 결정, 제품홍보 및 서비스 망 구축, 제품 카탈로그 및 사용자 매뉴얼 등 모든 자료를 우리 부서에서 기획하고 제작해야 했었다. 부장님은 나에게 일본어로 된 복사기 사용설명서 책자를 보여 주시면서 한글 매뉴얼을 만들 방법이 있겠는지 물어보셨다.


마침 내가 살던 이웃집에 일본어에 정통하신 교수님 출신의 어르신 하고 친분이 있던 터여서 한글 매뉴얼을 만들어 보겠다고 부장님께 말씀드리고 일본어로 된 책자를 받아 나왔다.


2주 후, 부장님께 한글로 된 복사기 매뉴얼 한 권을 제출하였다. 물론 이웃집 어르신께서 정확하게 한글로 번역하고 친필로 잘 정리하여 주신 거였다. 나는 번역본을 읽어 보고 영업용어와 기술용어 중 직역하였을 때 어색한 단어들이나 문장의 교정 정도만 한 후 다시 매뉴얼을 작성한 것이었다.


'삼성전자 복사기 카피맨 5000시리즈 사용자 매뉴얼'


부장님은 매뉴얼과 내 얼굴을 번갈아 보시면서 흐뭇해하셨다. 그리고 연말이 왔다. 인사고과 평정기간이 지나고 신년이 되었다. 인사고과 성적이 발표되었다. 생각지도 못했던 A등급을 받았다. 영문을 모르고 있었는데  A등급을 부장님께서 주셨다는 것을 알았다.


그룹 공채가 아니었으며, 오랫동안 함께 하며 정이 든 직원도 아닌 나에게 A등급을 주신 것은 부장님의 평가 기준이 학연, 지연, 출신관계가 아닌 오로지 결과물에 대한 회사의 이익가치와 부서성과기준의 평가였다고 볼 수 있다.


이처럼 목표가 뚜렷하고 성과중심의 냉철하며 품위 있는 리더의 모습을 보여주신 부장님은 리더로서 많은 능력을 실적에서도 보여주셨다.


이후 3년간 부장님은 우리 부서를 국내영업본부 부서 중 최상위 매출부서로 만들어 놓으신 후에 타 본부로 자리를 옮기셨다.


나도 대리가 되고 과장이 되고 부장이 될 때마다 '선생' 하고 야단치시던 부장님이 생각났다. 신기하게도 나는 부장님께 한 번도 '선생'이란 호칭을 듣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이 글을 쓰는 지금 부장님 생각이 많이 난다.  건강하게 잘 사셨으면 좋겠다. 한 번쯤 다시 만나서 부장님께 부탁드리고 싶다.


"부장님. 저에게 선생이라고 한 번 불러 주세요."


그런 날이 오면 좋겠다.


더 큰 가르침을 주실 수 있는 분이시기에!


내 회사문화 답사에서 첫 번째 존경하는 고수였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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