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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elvinstyle
May 04. 2024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각일병
회사문화 답사기 24
군대를 다녀온 남성들에게 군 생활 중 가장 무서운 계급을 말해보라 하면 십중팔구 ‘홍길동 상병님’을 먼저 떠올릴 것이다. 내무반의 군기와 질서 담당은 주로 상병 선임이 맡게 마련이고 복무한 부대마다 홍길동 상병님의 군기 잡기 방법은 각양각색이었겠지만 그 목표는 ‘내무반의 평화’이고 상위 계급인 분대장이나 소대장에게 잡히지 않는 ‘사병 중심의 자율경영’이었을 것이다.
나는 소위로 임관하여 최전방 GOP와 GP에서 부대를 지휘하였다. 소대원의 내무반 생활을 관리, 감독, 지도하는 미션으로 생활하였기에 내가 자리를 비웠을 때 어떤 일들이 홍길동 상병을 중심으로 일어나는지 속속들이 알 수는 없었으나 분위기 탐지나 첩보원(소대장 비서 역할을 하는 전령)을 통해 간헐적으로 내무반의 평화유지를 위한 홍길동 상병의 리더십 프로그램을 알 수 있었다.
훈련이 없을 때는 내무반 대청소나, 연병장 쓸기, 도로 평탄작업, 총기 손질, 군복 바느질과 다림질, 이발 및 용모단정 등이 소대원의 일상적인 과업이었고 이 과업의 한 복판에 홍길동 상병의 리더십은 유감없이 발휘되었다. 일명 군기반장인 홍길동 상병은 어떤 성품의 소유자가 그 직무를 맡는가에 따라 웃음이 끊이지 않는 내무반이 있는가 하면, 어떤 내무반은 하루 종일 절간처럼 말없이 조용한 곳도 있었다. 그의 리더십 스타일에 따라 초임 상병부터 신입 이병까지 일사불란하게 움직였으며 말년 병장의 기침 소리에 내무반 전원은 천당과 지옥을 오가기도 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내무반의 홍길동 상병은 기업의 부서 내 핵심 중간 리더이며 조직의 실행을 진두지휘하고 조직원과 대면하여 밀착 관리 및 지원을 하는 중요한 임무를 수행하는 포지션이었다.
가끔 그는 분대장인 하사들과 정면으로 대치하기도 하고, 은근히 분대장의 지시를 지연하거나 심지어 임무 수행을 방해하기도 하는 의도적인 저항을 하기도 했다. 가끔은 하사와 상병이 치고받고 싸우는 사건이 발생하기도 했다. 기싸움에서 서로 밀리지 않으려는 군복 입은 피 끓는 청년들의 투쟁이었던 것이다.
한술 더 떠 그는 신임 소대장이 부임하면 권력이양을 순순히 하지 않을 목적으로 소대장 길들이기 프로젝트를 벌이곤 했다. 지시받은 작업 진도를 늦추거나, 아침 점호 시간에 지각하거나, 멀쩡한 몸이 번갈아 가며 탈이 나서 교육훈련 시간에 의무대를 다녀오는 등이었다. 심대한 항명 행위나 지시사항 불이행이 아니기에 소대장에게 그들이 만만치 않음을 상기시키는 스트레스 유발자로 대치하는 역할 한가운데 그가 있었다.
군대에서 가장 무서운 계급은 상병이었다.
2006년 사무용품 B2B 구매아웃소싱 세일즈팀을 이끄는 영업 본부장으로 부임했다. 군대 시절 내무반 분위기처럼 초면인 그들과 나는 서로를 모르기에 다소 서먹하고 분위기는 어색했다. 조직 내 홍길동 상병이 누구인지 파악하는 것이 중요했다. 당연히 그가 있었다. 가장 열심히 세일즈를 하는 홍길동 과장이었다. 팀장은 본부장인 나의 전략 전술 방향을 잘 이해하고 지지해 주었으며, 홍길동 과장은 말없이 묵묵히 자신의 영업을 하면서 신입 세일즈맨들을 독려하는 위치에 있었다.
술을 못 마시는 나는 고객이나 직원들과의 소프트 토크를 통한 친밀감 조성을 위해 함께 담배를 피우는 시간을 의도적으로 가졌다. 내근을 하는 홍길동 과장을 자주 불러서 담배를 한 대 얻어 피면서 이런저런 신변잡담을 나누면서 그와 친해지기 위해 스몰토크가 아닌 스모킹토크 리더십을 발휘하였다. 리더에게 저항하는 군대시절 홍길동 상병 타입은 아니었기에 그에게 관심을 주고 그의 세일즈의 애로사항 등을 청취하고 지원과 격려를 해 주는 것만으로도 그는 사기충천이 되었으며 그의 중간역할을 통해서 영업본부의 분위기는 밝아져 갔다.
직장에서 중간관리자를 잘 만나는 것도 리더의 복이다.
나는 복 받은 리더였다.
몇 개월 뒤 모회사 경영진 회식에 계열사인 우리 회사 경영진 초대 회식이 있었다. 새로 부임한 나를 모회사 경영진에게 소개도 하는 자리를 겸한 회식이었다.
미식가인 모회사 대표님의 단골식당인 청담동 ‘새벽집’이 회식 장소였다. 설레고 긴장되는 마음으로 회식에 참여하였다.
한우전문식당인 ‘새벽집’은 문전성시를 이루고 있었다.
끊임없이 들락날락하는 외제 승용차에 놀랐고, 홀에 가득 찬 손님들에 놀랐다.
“여기가 말로만 듣던 새벽집이구나… 연예인과 강남 부자들의 단골식당이라는…”
혼자 속으로 생각했다.
회식을 위해 미리 예약된 방으로 들어갔다.
모회사 대표님과 몇몇 임원분과는 입사 후 상견례가 있었으므로 낯설지는 않았다. 처음 인사를 나누는 부사장님과 재무이사님과 가볍게 통성명하고 자리에 앉았다.
메뉴판의 한우 가격에 또 놀랐다.
A++ 국내산 한우 꽃등심 150그램 85,000원
꽃등심 크게 한 점에 대략 5000원인 거다.
회식비용을 아까워하지 않는 모회사였기에 10명 남짓한 두 회사의 경영진 회식에 꽃등심만 30인분 이상 먹었다. 맛은 정말 좋았다.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음식이 법인카드로 먹는 음식이지만 새벽집의 한우는 너무도 비싸지만 퀄리티가 다르긴 했다.
☞ 복병이 나타났다.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각일병.
회식 테이블 위에는 임원의 수만큼 고급 와인이 한 병씩 놓여 있었다.
모회사 부사장님이 회식을 주관하는 진행자 역할을 하셨다. 전체 임원들에 대한 의례적인 칭찬과 너스레를 늘어놓으시면서 회식의 룰을 알려 주셨다.
1. 자리에 놓인 와인은 착석한 임원 개인용으로 ‘각일병’이다
2. 타인의 와인 잔에 와인을 따른다.
3. 단, 본인의 와인을 타인에게 따라 줄 수 없다.
4. 건배를 한다. 마신다.
5. 빈 잔을 보여준다.
6. 각일병이 다 빌 때까지 마신다.
7. 각일병이 비지 않으면 회식이 끝나지 않는다.
8. 애주가를 위하여 각이병, 각상병을 원하면 즉시 진급시켜 준다.
모회사 대표님과 경영진과의 첫 회식에서 계열사 임원들이 기가 꺾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술을 못 마시는 나였지만 못 마신다고 자리를 피할 수 없는 분위기였다. 와인의 첫맛은 달콤하고 부드러워 어느 정도 받아들일 수 있겠다고 판단했다.
눈 딱 감고 마셔 보았다. 그리고 한 잔에 두 잔에 각일병이 비도록 두 시간 남짓한 회식 시간 내내 결국 한 병을 다 마셨다.
미션 성공!
의외로 정신은 말짱했다. 속도 쓰리지 않았다.
비싼 꽃등심으로 배를 가득 채운 덕분이지 싶었다.
다만 얼굴과 몸은 이미 고열환자처럼 붉게 타올라 있었다.
회식이 끝나고 택시를 타고 귀가했다.
찬물로 샤워를 하면서 취기를 가라 않길 바라며 자리에 누웠다. 10분쯤 뒤부터 뱃속이 뒤틀리기 시작했다. 숨이 막히며 헛구역질이 올라왔다. 각일병의 횡포가 시작된 것이었다.
몸에 열이 올라오고 땀이 삐질삐질 나면서 아랫배가 몹시 아프고, 속은 더부룩하고 숨도 막혔다. 고통스러운 토가 시작되었다. 한 번, 두 번, 세 번, 네 번. 그렇게 새벽 내내 잠 못 자고 화장실을 들락날락 거리며 토를 하니 먼 동이 트기 시작했다.
알코올분해능력이 거의 없는 나는 각일병의 치명적인 공포와 고통을 고스란히 온몸으로 받아내고 일상적인 회사생활을 위하여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정시에 맞추어 출근했다. 하루가 참 길게 느껴졌다. 업무를 보는 내내 구름 위에 뜬 기분으로 각일병의 공포로부터 조금씩 해방되고 있었다.
사교의 품격을 더하고, 차분하고 우아한 자리의 대명사인 와인을 회식자리 각일병으로 경험하고 나니 소주는 쓴 맛에 못 마시고, 맥주는 그 양에 놀라 못 마시고, 와인은 달콤하나 각일병의 추억으로 입에 댈 수가 없다.
확실하게 나는 네이티브 금주가임을 확실하게 알게 해 준 각일병이 무섭고 고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