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산을 쌓으며 행복을 만들어갑니다

작게 살며 크게 모은 2년

by Kema

2011년 11월, 원룸 신혼집에서 시작한 우리의 살림은 작은 딸아이의 탄생과 함께 2년 만에 첫 이사를 맞았다.


부엌에 딸린 작은 곁방 하나, 그리고 거실 겸 안방이 있는 열일곱 평짜리 주공아파트. 그곳은 우리에게 큰 행복과 안정감을 가져다주는 공간이었다. 베란다에 빨래를 널 수 있고, 복도에서 먼지를 털 수 있다는 사소한 여유조차도 소중했다. 서른 평 신축 아파트에서 시작한 사람에게는 이곳이 불편과 제약의 공간일지 모르지만, 원룸에서 출발한 우리에게 이 아파트는 작은 사치를 누리는 듯한 설렘을 주었다.


당시 이 주공아파트의 전세금은 우리가 살던 원룸보다 4,500만 원이 비싼 1억 3,500만 원이었다. 하지만 최소한으로 시작해 신혼 2년의 기간 동안 최대한 아끼고 모은 덕분에 전세금을 추가로 내고도 일억 원에 가까운 현금을 여유로 남길 수 있었다. 단순히 계산해 보면 1년에 7천만 원 정도를 모은 셈이다. 지금의 내 기준에서 보아도 대단한 금액이라는 생각이 들고, 그 시절의 절약과 노력들이 오늘의 행복을 만든 토대가 되어 주었다. 원룸에서의 2년은 내게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하기 짝이 없는 시간이었던 것이다.




맞벌이를 하던 우리 두 사람의 실수령액은 달에 700만 원 정도였다. 연간 성과급이 조금씩 나오기도 했지만, 1년에 7천만 원을 모으려면 한 달 생활비를 150만 원 이내로 맞춰야 했다. 신혼살림은 모든 것이 새롭고 즐거웠지만, 동시에 지출을 관리하는 일은 살림 경험이 없던 우리에게 긴장의 연속이기도 했다.


원룸에 있는 형광등 하나 켜는 일도 꼭 필요해지면 했다. 나는 한겨울에도 되도록 더운물을 쓰지 않았다. 도저히 한기가 들 때는 욕실에서 팔굽혀펴기를 했다. 몸이 간신히 구겨 들어가는 가운데서도 물 틀기 전에 스무 개, 몸 적시고 또 스무 개, 비누칠하고 스무 개 이런 식으로 하다 보면 더운물을 쓰지 않고 샤워를 마칠 수 있었다. 아이가 태어나고는 그럴 수 없었지만, 기름값도 얼마가 나올지 가늠이 되지 않아 전기장판에 두꺼운 이불을 덮은 채 떨림을 버티곤 했다.


수입을 늘릴 방법도 최대한 찾았다.


회사에서 사내 강의를 다니는 일 외에도, 직장을 다니면서 할 수 있는 부업들을 최대한 찾아서 했다. 주말 과외를 하거나, 동네 보습학원에서 강의를 하기도 했다. 아내는 틈날 때마다 설문 조사 아르바이트에 참여하였다. 배가 불러오는 시기에도 직접 현장에 나갔고, 장 본 물건들의 바코드를 일일이 입력해야 하는 조사 아르바이트도 마다하지 않았다. 이렇게 하여 받은 몇 천 원 혹은 몇 만 원짜리 현금과 상품권을 생활비에 보탰다.


나는 잦지는 않았지만 1년에 두어 번 정도 해외 출장을 다닐 일이 생겼다. 4박 5일 정도의 일정으로 가면 사흘 정도는 이동하고 일하는 데 쓰고, 보통 마지막 하루 정도는 해당 국가 관광을 하게 마련이다. 다른 이들이 관광을 다닐 때, 나는 부피가 작고 무겁지 않은 물건들 중 우리나라에서 팔 수 있는 물건들을 미리 검색해 갔다. 보통 발포비타민이나 영양제 같은 물건들이 단가도 괜찮고 잘 팔렸다. 야무진 내 아내는 선물 대신 트렁크 가득 사 온 물건들을, 출근길에 하나씩 상자에 포장해 택배로 보내곤 했다.


이렇게 한 푼씩 모은 돈으로 소비를 하다 보니, 천 원 한 장 허투루 쓰기가 어려웠다. 한 번 우리 손에 들어온 돈은 쉽사리 내보내지 않았다. 길에서 파는 군고구마 한 봉지도 며칠을 참았고, 외식이라고 한 것도 5천 원짜리 즉석떡볶이가 전부였다. 그 고구마는 세상 그 무엇보다 달았고, 분식집 의자에 앉아 먹는 떡볶이는 값으로 매길 수 없는 행복이었다.


원룸에서 2년을 그렇게 보내자, 종잣돈이랄 만한 자본이 생겨났다. 그리고 나는 또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이제, 이 돈이 그냥 머물게 둘 수는 없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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