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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쓰는 편집장 Dec 01. 2021

들뢰즈, <프루스트와 기호들> - 관계의 언어

사랑과 거짓말

  "... 사랑의 기호는 사교계의 기호들과 다르다. 그것은 사유와 행위를 대신하는 텅 빈 기호가 아니다. 사랑의 기호들은 오로지 자기가 표현하는 것을 감추면서 우리에게 이야기할 수밖에 없는 거짓말의 기호들이다. 사랑의 기호들이 표현하는 이 감추어진 것이란 미지의 세계들, 행위들, 사유들의 원천이다. 사랑하는 사람의 거짓말은 사랑의 상형문자이다. 사랑의 기호를 해석하는 자는 필연적으로 거짓말의 해석자다. ..." - 들뢰즈, <프루스트와 기호들> -


  저런 식으로 이야기를 한다는 건, 내게 마음이 없다는 의미일까? 그런데, 그 사람을 마음에 두고 있는 나는 그 사람을 어떻게 대하고 있는지를 돌아보면, 나도 그럴 때가 있잖아. 그런 의도로 한 이야기는 아닌데, 누가 들어도 그런 의미로 받아들일 말을 하고 있을 때. 실상 내가 했던 모든 말들은, 당신을 좋아한다는 의미였는데...


  커뮤니티에서 오가는 격식과 교양의 언어들이 공허하게 느껴질 때도 있잖아. 사랑의 언어는 그런 텅 빈 기호는 아닐망정, 또 솔직하진 못하고... 들뢰즈에 따르면 그 이유가, ‘사랑받지 못하면서 사랑한다’는 모토에 얽매여 있기 때문이라고... 쉽게 말해, 나만 사랑하고 있는 걸까봐서. 그러나 이미 어떤 식으로든 시그널은 방출하고 있었던 것.


  "사랑에 빠진다는 것은 어떤 사람을 그 사람이 지니고 있거나 방출하는 기호들을 통해서 개별화시키는 것이다. 즉 사랑에 빠진다는 것은 이 기호들에 민감해지는 것이며 이 기호들로부터 배움을 얻는 것이다. 우정은 관조와 대화를 양분삼아 자라날 수 있는 반면 사랑은 무엇의 해석에서 태어나고 또 그것으로 양육된다. ... 사랑, 그것은 사랑하는 사람 속에 감싸여진 채로 있는 우리가 모르는 세계를 펼쳐 보이고 전개시키고자 하는 우리의 노력이다." - 들뢰즈, <프루스트와 기호들> -


  그런데 그 사람도 그랬던 거야. 그래서 아닌 척도 해보고... 기회일 수도 있는 순간을 그르치기도 하고... 때론 보란 듯이 오해의 여지를 남기려다 더 데면데면해지는 사이. 당사자끼리는 대충 느끼지. 그러나 또한 그 진심이 아닌 말과 행동이 어떤 의미일까를 고민하게 되면서 하루종일 그 사람 생각만 하는 거. 그 해석이 어떠하든, 이미 내게서 사랑인 것.


  들뢰즈가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등장인물들로 해석한 우정과 사랑이니, 일반적으로 적용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으나... 우정은 이미 공감의 조건을 내재한 이들끼리의 유대라는 것. 이 사이에서 오가는 언어에는 딱히 해석이란 게 필요 없지. 그런데 사랑하는 사람을 우정의 대상처럼 대하진 않잖아.


  철학사에서 실존주의와 구조주의가 대립할 즈음부터 주체의 의미는 다소 미미해진다. 그보다는 비인칭적인, 그 주체를 결정하는 환경적 토대, 그 존재론적 조건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한다. 들뢰즈 또한 그와 그녀 자체보다는, 그와 그녀의 세계를 말한다. 하여 우정과 사랑이란 것도 인격과 인격의 만남에 지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세계와 세계와의 만남이다. 우정은 이미 비슷한 성향으로 살아가던 이들 사이에서 확장되는 유대일 때가 흔하지. 물론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지만... 이를테면 데미안의 경우처럼, 나를 변화시키는 뜻밖의 ‘사건’으로 다가오는 우정도 있긴 하고...


  사랑은 보다 더 그렇지 않은 경우잖아. 때문에 우리는 사랑을 통해 변화를 겪는다. 적어도 철학에서 다루는 사랑은 그런 ‘존재와 사건’이다. 그 사람이 살아온 시간, 그 존재론적 토대를 이해해 보고자, 나의 체계 바깥에서 이해의 노력을 잇대며, 지금까지 내게 익숙했던 시간과는 다른 결의 세계를 배우게 된다. 그로써 내게 이전과 다른 시간을 열어주는 타자에 관한 것, 사랑은 그런 ‘탈존’과 ‘외존’으로서의 배움이다. 하여 우정은 공감의 주파수가 선행하는 경우가 흔하지만, 사랑에서는 일단 주파수가 먼저 잡히고 공감의 노력이 뒤따른다. 끝내 이해되지 않아도 그냥 사랑할 수밖에 없는, 사랑, 그 놈.


  그림은 하이경 작가님의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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