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형의 폐허들
"예술의 기능 중 하나는 인간의 기억에 환상적인 지난날을 보태는 것이다." -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
<마르틴 피에로>라는 아르헨티나를 대표하는 서사시의 서문으로 적은 구절이니, 여기서 예술이란 곧 문학을 뜻한다. 어록의 전제는, 작가나 독자나 각자의 기억을 토대로 쓰고 읽는다는 것. 회상의 이미지로 결속된 문장 안에선, 이별의 상처조차 사랑했던 날들의 기억만큼이나 아름답지 않던가. 우리는 그런 승화의 문장들을 통해, 실제보다 더 먼 곳에 가닿는다. 이제 용서할 수 있을 것 같기도, 이미 내려놓은 것 같기도, 때로 다시 사랑할 수 있을 것 같기도...
옛사랑에 관한 가사가 아무리 절절해도, 처참한 심정으로만 그 노래를 듣고 있는 청중은 없을 터, 이미 승화 과정을 거친 그 자체로 아름다운 것이다. 글도 그렇다는 거지. 그 숙고의 시간에 어떤 식으로든 승화가 이루어진 결과물. 오해의 소지가 없어야 하는 공문서와 논문이 아닌 이상에야, 굳이 반듯한 글쓰기를 종용할 필요가 없는 이유이기도... 각자의 기억에 각자의 방식으로 덧대는 환상, 그 환상의 성분과 함유량에 따라 에세이가 되고 시가 되고 소설이 되고 하는 것이지. 극으로 밀어붙인 경우가 보르헤스의 환상문학이기도 할 테고….
그림은 이은지 작가님의 작품. 예전의 인터뷰 때, 작업과 관련해 <미사고의 숲>이란 소설을 말씀하셨었는데, 대강의 내용을 들어보니, 보르헤스의 <원형의 폐허들>과 비슷한 분위기인 듯 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