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이비드 흄과 경험론
“20세기의 경험주의자 버트런드 러셀은 좀더 섬뜩한 예를 들었다. 닭 주인이 뜰을 지나가면 모이가 생긴다는 사실을 날마다 체험한 병아리가 마침내, 닭 주인이 뜰을 지나가는 것과 그릇에 든 모이 사이에 인과 관계가 있다는 결론을 내리게 됐다는 거야.”
“그러다가 어느 날 모이를 못 얻어 먹게 되나요?”
“어느 날 닭 주인이 뜰을 지나와서 그 놈의 목을 비틀었지 뭐니.”
“어머, 끔찍해라!”
- <소피의 세계>, p401 -
철학에 조금 관심이 있는 분들은 한 번쯤 들어봤을 일화. 나도 예전에 교양서로 서양철학의 줄기를 잡아가는 시기에 읽었던 기억. 러셀의 일화였다는 건 새삼...
흄의 철학에 대한 부연. 인과라는 건 심리적 인과이지, 그 자체로의 인과가 아니라는 것. 흄은 과학까지도 비판한다. 이를테면 천동설 같은 경우. 우리의 감각에는 여전히 천동설이 맞잖아. 우리에게 익숙한 인상들로 배치된 관념 안에서의, 그러니까 전제하고 있는 패러다임 안에서의 인과라는 거.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들뢰즈의 첫 논문 주제가 이 철학자이기도 하다. 흄의 전제는 스피노자의 영향. 훗날 현상학의 전제이기도... 종종 경험론을 조금 오해하시는 분들 있는데... 합리론을 비판하려면, 그냥 그건 틀리고 내 말이 옳다는 식으로 결론짓는 게 아닐 거 아니야. 합리론이 어떤 면에서 합리적이지 않은지를 논리적으로 반박을 한 후에 자기 의견을 개진하는 거지. 비판을 하려 해도 상대에 관한 면밀한 이해가 선행해야 되는 것. 때문에 경험론은 때로 고도 관념론을 동반하기도 한다. 정도전이 역설적으로 불교의 대가였던 것처럼, 키에르케고르가 헤겔을 비판하면서도 되레 헤겔의 전문가였던 것처럼, 들뢰즈가 <안티 오이디푸스>를 저술했지만 라캉도 그를 좋아했을 만큼 정신분석 활용에는 견줄 자가 없었던 것처럼...
러셀의 일화를 관계의 문제에 적용해 보면, 상대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던, 내 심리적 인과로 오류를 빚는 경우들이 있잖아. 그런 사람일 줄 몰랐는데, 어느 시점부터는 ‘원래 그런 사람이었구나’ 하고 내 인과 안에서 폐기가 되는 경우들. 이젠 뭔 짓을 해도, 왜 저러는 것인지에 대해 별 관심도 없고...
그런데...
내가 사랑하는 사람은 꼭 이런 경우이지 않아? 그렇다고 내 심리적 인과에서 폐기를 할 수도 없는 노릇. 무슨 사정이 있겠지 하며 끝까지 믿어보고 싶은 순정. 그럼에도 한편으론 도대체 나한테 왜 그러는지를 모르겠어서 죽겠는... 하긴 나는 그 사람한테 어떻게 하고 있었는지를 내 스스로 자각 못할 때가 있잖아. 그래서 기분 풀릴 때까지 비트시라 기꺼이 내 목을 내어주는, 사랑, 그 놈 앞에서의 결론. 그냥 닥치고 사랑할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