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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쓰는 편집장 May 16. 2022

사르트르의 '보들레르론' <악의 꽃>

타인, 타자, 시선

... 보들레르는 자신을 아버지가 언제라도 돌아오길 기다리고 있는 탕자로 꾸미고 있었다표면적으로는 신에 대한 반역이지만 그의 악마주의라는 것은 그리스도교의 뒷문으로 들어가려는 시도’(엘리엇)에 지나지 않았다.


  <존재와 무>의 마지막 챕터에, 역자가 정리해 놓은 사르트르의 ‘보들레르론’. 그는 어려서 일찍 아버지를 여읜, ‘부재’라는 공감으로 보들레르를 이해하면서, 저 자신의 ‘연기’를 고백하기도 한다. 


  정신분석에서도 아버지는 나를 길들이는 사회적 이데올로기로서의 한 표집이다. 그가 지닌 사회적 지위나 기표가 가정에서도 작동한다는 것. 프로이트의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는 후학들에게서는 점점 사회학적 관점에서 해석된다.


  사르트르에겐 그 ‘부재’가 오히려 더 큰 도덕으로 작동했다. 자기 인생의 ‘입법자’로서의 사르트르는 ‘아버지가 안 계셔도’ 반듯하게 자라나려는 노력을 스스로 기울였다. 그 결과, 어른들 앞에서 ‘연기’를 했다는 거야. 그 심정을 보들레르에게 투영한다. 이미 이때부터 자아의 근거로서 ‘타인의 시선’에 관한 이론이 정립되고 있었던 셈.


  철학에서 ‘타자’와 ‘타인’ 이 어떤 차이인가 하면... 타인은 나의 바깥에 있는 존재인 거고, 타자는 나를 포괄하는 세계인 것. 우리가 거울을 볼 땐, 오롯하게 내 시선만을 감안하는 게 아니잖아. 남에게 어떻게 비춰질까를 고민하는, 이미 타인의 시선이 관여해 있는 나의 시선이 거울에 닿고 돌아오는 것. 그렇듯 자아는 곧 타자이기도 하다. 라캉은 사르트르에게서도 많은 영향을 받았다. 그 이외에도 많은 철학의 단서가 발견되는 라캉의 정신분석이지만, 대표적으로 프로이트와 사르트르가 융합된 결과. 


  퇴락과 타락에서까지 미학을 찾아낸 보들레르의 <악의 꽃> 역시, 그가 지닌 순수로 점철된 작업은 아니었다는 거야. 그 역시 세계의 인정과 관심을 필요로 했던 타자로서의 효과였다는 것. 마치 부모와 교사의 관심을 받고 싶어서, 보다 더 말썽을 피우는 사춘기 소년처럼...


  사르트르는 이렇게 말했다.

  ‘보들레르는 자신을 타자인 것처럼 자신을 보는 것을 선택한 인간이다. 그의 생애는 실패의 역사에 지나지 않는다.’


  그럼 사르트르 자신은 그런 타자로부터 자유로웠는가를 묻는다면, 보들레르에 대한 지적은 또한 스스로에 관한 고백일 수 있다는 거. 실상 보부아르에게 청혼을 한 적 있었단다. 물론 보부아르가 거절했고... 최근에 공개된 어떤 편지글에서 밝혀진 사실이지만, 나중에 가서는 보부아르도 그의 여성 편력과, 자신에게 질투의 표현 한 번 건네지 않는 그의 태도에 지쳤단다. 그들의 실험은 제도적 부부가 아니었을망정, 이념적 부부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했던 건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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