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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쓰는 편집장 May 15. 2022

<말테의 수기>, 라이너 마리아 릴케

시인이 되어 가는 동안에

이미지 출처 - djevojka.tumblr.com

  시인이 되고자 하는 말테가 파리에서 지내며 느낀 점을 메모로 풀어 나가는 작품으로, 특별히 중심이 되는 서사 없이 단락별로 다양한 단상을 기록한 형식이다. 의식의 흐름에 따라 한 주제에 집중해 서술하다가, 다음 이야기로 넘어 가곤 한다. 릴케가 목격한 대도시의 이면, 고독감과 우울 등의 정서가 영감이 되었다.

  시인이 쓴 소설답게 시어로 가득한 소설. 릴케가 매번 사 용하는 언어들은 아름답고, 감각적인 문장들의 연속이지만, 그것들이 표현하는 바는 지독히 어둡다. 파리 골목골목에 배어 있는 우울함, 활기찬 대도시 뒤편으로 소외된 가난한 이들의 피곤한 삶, 여기저기서 목격하는 죽음의 그림자들이 끊임없이 나열된다.

   사람들은 살기 위해서 여기로 몰려드는데, 나는 오히려 사람들이 여기서 죽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말테가 대도시에서 목격하는 죽음은 획일화되었고 몰개성적이다. 과거에는 모두 각자의 집에서 각자의 방법으로 맞이했다면 대도시의 죽음은 모두 병원에서 이루어진다. 그는 항상 죽음의 공포에 시달리며 살아간다. 그러나 죽음도 삶의 일부라는 표현을 그 누구보다 깊게 이해하는 사람이다. 그는 죽음 또한 살아가는 과정과 마찬가지로 한 사람의 본질을 나타내는 것이라 생각한다. 출생부터 생명이 다하는 마지막에 이르기까지 모든 과정이 한 사람의 온전한 존재 안에 포함된다. 그는 애초에 생명이 잉태될 때 임산부의 배 속에는 삶과 죽음 각각의 씨앗이 함께 있는 것 같다고 말한다. 우리는 모두 ‘자기 자신의 죽음을 가졌다’고….

이미지 출처 - worthpoint.com

   말테에게 있어 죽음에 관한 강렬한 기억은 외할아버지의 말년에 대한 것이다. 귀족 신분으로 지방의 유지이자 고위 관직자였던 할아버지는 생전 건강한 시절에는 사람들에게 두려움과 존경심을 함께 불러일으키는 분이었다. 역사 그 자체인 오래된 성에 때때로 출몰하는 유령들마저 태연하게 받아들이며 함께 생활할 정도로 대범하고 침착했던 할아버지. 그러나 세상을 뜨기 전 10주 동안의 할아버지는 일생 동안 볼 수 없었던 가장 고통스럽고 포악하며 이기적인 모습을 드러낸다.

   육체적인 고통이 견딜 수 없을 정도로 힘들었던 외할아버지는 조금이라도 편하게 몸을 누일 곳을 찾아, 광활한 성 안의 이 방 저 방을, 심지어 수년간 닫혀 있던 방까지 열어젖힌다. 밤마다 밀려드는 참을 수 없는 고통에 마을 전체가 떠나가라 울부짖었으며, 그 비명소리에 온 마을이 불면증과 불안에 시달린다.

   죽음에 대한 말테의 조금 다른 생각. 그것은 할아버지에 게 주어진 그만의 죽음이었으며, 고통을 견디지 못해 터져 나온 할아버지의 낯선 모습조차 사실은 모두 다 할아버지의 본질이며, 그에게 주어진 죽음의 모습이라고….

이미지 출처 - liwi-verlag.de

   하나의 목소리, 7주 전까지만 해도 아무도 들어 보지 못한 목소리였다. 시종관의 목소리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 목소리의 주인은 크리스토프 데트레프가 아니고, 그의 죽음이었다.

   그의 죽음은 10주간 머물기로 하고 왔다가 10주간 머물렀다. 이 기간 동안 그는 그전의 크리스토프 데트레프 브리게 자신이 그랬던 것보다 훨씬 더 주인 행세를 했는데, 훗날 폭군이라 불릴 왕과 같았다.

   그것은 어떤 수종병(水腫病) 환자의 죽음 같은 것이 아니라, 시종관이 일생 동안 내부에 간직하면서 길러 냈던 사납고도 장엄한 죽음이었다. 그 자신이 평온했던 시절에는 다 써버릴 수 없었던 지나친 교만, 의지, 지배력이 그의 죽음 속으로 흘러들어 이 죽음은 이제 울스가르드에 머물면서 그 잉여분을 탕진했다.

   내가 지금까지 만났거나 말로 들었던 사람에 대해 생각해 보면, 늘 똑같았다. 그들은 모두 자기 자신의 죽음을 가졌다.

   ‘일생 동안 내부에 간직하면서 길러 냈던 사납고도 장엄한 죽음’, 그리고 인간이 지닐 수 있는 나쁜 점들의 ‘잉여분’ 을 탕진했다는 문장은 섬뜩하기도 하다. 내 안의 악덕을 다듬지 못하고 다스리지 못한다면 죽음에 이른 마지막 순간에라도 결국에는 터져 나와 내 민낯을 드러내고, 소진하지 못한 악덕의 잉여분이 그렇게 만천하에 공개된다는 것이 터무니없게 느껴지지 않는다. 몰개성적이지 않고 오로지 자신에게 주어진 죽음을 살아낸다는 것은 할아버지의 마지막 10주처럼 끔찍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 과정을 통해 한 사람이 지닌 본질을 남김 없이 드러냄으로써 삶을 가식이나 모자람 없이 온전히 완성하는 것이기도 하리라.


- <세기의 책>, 릴케, 『말테의 수기』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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