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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쓰는 편집장 May 25. 2022

사르트르, <존재와 무> - 이해와 오해

실제의 우리

... 그러므로 만일 내가 나가기 위해 ‘출구’로 지정되어 있는 문을 이용한다면, 나는 나의 ‘개인적’인 기도(企圖)의 절대적인 자유 속에서 이 문을 사용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나는 하나의 도구를 ‘발명적’으로 구성하지는 않는다. 나는 사물의 단순한 물질성을 나의 가능을 향해 뛰어넘는 것은 아니다. 반대로 대상과 나 사이에 이미 하나의 인간적인 초월이 숨어들어 있어서, 그것이 나의 초월을 안내하는 것이다. 이 대상물은 이미 ‘인간화’되어 있다. 그것은 ‘인간계’를 의미한다. ... 내가 그것을 이용할 때, 나는 이 대상물을 자체를 따로 있는 것은 아니다. 나는 인간적인 질서에 순응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나의 행위 자체에 의해 타인의 존재를 ‘승인한다.’ 나는 타인과의 하나의 대화를 세운다. 그것은 모두 하이데거가 매우 적절하게 말한 그대로이다. - <존재와 무>, 동서문화사, 정소성 역, p692 


  동굴을 생각해보자. 어떤 자연현상의 이유로 우연히 그렇게 만들어진 거지, 우리의 출입을 유도하려고 거기에 뚫려 있는 것은 아니다. 문이라는 공간 역시, 우리가 목적적으로 인식하고, 그 인식에 준해 만들고 사용한다는 것. 그 자체로는 그저 구멍난 벽일 수도 있지. ‘구멍’과 ‘벽’이란 것도 우리의 목적성을 투영한 단어다. 열림과 닫힘이 공존하는 무언가, 그러나 또한 ‘열림’과 ‘닫힘’이란 단어도... 무한대로 뻗어간다.


  하이데거 철학의 큰 주제 중 하나가, 우리가 세계를 목적적으로 인식한다는 것. 그의 책에서 ‘도구’ 이야기가 나오는 페이지들이 대강 이런 함의. 이런 목적성의 근거가 타자라는 거야. 이미 태어난 순간부터 세상이 그 도구를 그렇게 쓰고 있었던 상황을 습득하는 거니까. 같은 맥락에서 언어가 그렇다는 것. 그 언어를 매개한 사유가 그렇다는 것. 그 연장에서 우리는 남들이 공증하는 가치를 목적성으로 살아간다. 이렇게 라캉의 정신분석으로 이어진다.

 ... 그러므로 ‘대상 - 우리’라고 하는 체험과 ‘주관 - 우리’라고 하는 경험 사이에는 어떤 대칭도 존재하지 않는다. 전자는 하나의 현실적 존재 차원의 드러내 보임이며, ‘대타’에 대한 근원적인 체험을 단순히 내용적으로 풍부히 한 것에 해당한다. 후자는 인공이 가미된 하나의 우주 속에, 또는 일정한 경제적인 형식을 가진 하나의 사회 속에 몰입해 있는 하나의 역사적인 인간에 의해 실감되는 하나의 심리적인 경험이다. ‘주관 - 우리’라고 하는 경험은 특수한 어떤 것도 드러내 보이지 않는다. 그것은 순전히 주관적인 하나의 ‘체험’이다. .... -p696


   목적성이란 어떤 식으로든 의미화가 된 대자적 가치. 그 도식을 관계의 문제에 적용해 보자. 담임교사는 자신의 반 학생과 가장 잘 소통하는 사람이고자 한다. 그리고 그렇게 믿는다. 물론 좋은 선생님이라면, 반 학생들도 그의 진심을 안다. 그러나 담임교사이기 때문에 도리어 말하지 못하는 것들도 있거든. 그런 문제를 말할 수 있는, 그 반과 친한 비담임교사와만 공유되는 정보도 있다. 담임교사는 그렇게 존재하는 관계(대상 - 우리)를 모른 채, 자신이 인식한 관계(주관 - 우리)만을 알고 있는 거지. 


  가장 큰 착각 중에 하나가, 부모가 자신의 자녀를 가장 잘 안다는 믿음이라잖아. 아마 오은영 박사의 솔루션을 듣지 않고, 자기 믿음을 고집하는 부모들도 꽤 있을 터. 내 인식 안에서의 ‘우리’와 실상의 ‘우리’는 다른 매트릭스를 지닌다. 서로의 진심을 쉬 드러내지 않는 시대, 또한 어떤 집단과 계층에서는 더더욱... 전체에 준해 존재하는 나는, 저들이 나를 이렇게 생각할 거라는, 그 주관적 인식에 준해 전체의 성격을 오해한다. 결국 타인의 시선이라는 건, 타인에게 닿고 돌아오는 내 시선인 것. 그러나 또한 그 오해들의 묶음인 전체화 된 시선 속에서 자라나고 자아를 정립해 가는, 결국엔 타자의 담론. 

... 그러나 대자는 단순히 모든 존재자에 대해 하나의 존재를 구성하는 존재일 뿐만이 아니라, 그것에 의해 존재자인 한에서의 존재자 위에 모든 존재적인 변양이 돌발하는 존재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하이데거는 미처 보지 못했다. -p697


   하이데거는 자신이 사르트르와 묶이는 걸 불쾌하게 여겼단다. 자신을 찾아오는 것도 귀찮아했고... <존재와 무>를 대변하는 문장이지만, 하이데거 전공자들은, 사르트르는 하이데거를 오해했다며, 인정하지 않을 게다. ‘대상 - 우리’는 사르트르 저 자신에게 돌아가야 할 판.


  라캉도 그런 말을 했듯, 오해와 환상일망정, 그 오해와 환상의 속성이 자신의 인식 체계를 대변하는 존재론적 가치라는 거야. 그렇게 오해를 할 수밖에 없도록, 오해된 세계와 순환하는 주체. 오해를 ‘이해’로 바꾼다면, 자신의 이해대로 세계를 의미화하는 개인적 가치, 그런데 그것이 타자의 담론으로부터 자유로운 의미화냐, 아니면 타자의 담론에 매몰되어 그저 전체의 하나의 표집으로 살아가는 사물화냐. 그렇듯 사르트르에게서 즉자와 대자 관계는 단순하지가 않다.


  모르고서도 그 오해와 환상 속에서 잘 살아가면 그만인 일인데, 그 모든 것이 내 이해에 대한 배신으로 존재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는, 삶의 환멸을 느끼게 되는 순간이 다가올 때도 있잖아. 때론 ‘우리’ 밖으로 걸어나와야 ‘우리’의 실체가 제대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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