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글쓰는 편집장 May 26. 2022

사르트르의 무신론 - <존재와 무>, 타자

레비나스, 니체, 스피노자, 공자

... 이 절대-존재는 타자로서의 한에서 자기이며, 자기로서의 한에서 타인인 존재이다. 이 절대-존재는 타자로서 그 자기-존재를 자유롭게 자기에게 줌으로써, 존재론적 증명의 존재 자체인 존재, 다시 말하면 ‘신’이 되는 존재이다. 이런 이상은 내가 나와 타자의 관계의 근원적인 우연성을 극복하지 않고서는 이루어질 수 없을 것이다. 다시 말하면, 타자가 나에 대해 자기를 다른 것이 되게 할 때의 부정과, 내가 타인에 대해 나를 다른 것이 되게 할 때의 부정 사이에는 어떤 내적 부정의 관계도 존재하지 않는데, 이 사실을 내가 극복하는 것이 아닌 한, 이런 이상은 실현될 수 없을 것이다. - <존재와 무>, 동서문화사, 정소성 역, p597


  남의 눈치 보지 말고 살라 말하는 강연자들은, 과연 그렇게 살아갈까? 아니면 강연을 듣고 있는 사람들의 눈치를 살피며 그들이 듣고 싶은 말을 하고 있는 것일까? 우리는 타자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그것이 자기 존재의 기반이면서, 질서 체계와 양심의 근거이기도 하기 때문에... 


  레비나스는 타자를 무한으로 밀어붙인 개념을 ‘신’이라고 말한다. 그렇다고 그가 무신론자인 건 아니고, 스피노자 식의 개진이다. 인간의 지평으로 이해하는 신이 과연 절대적 존재일 수 있겠냐 말이다. 니체의 표현처럼, 인간에게 갇힌 신이지. 분명 우주의 원인이 되는 무언가는 있겠지. 그것이 인간의 상상력으로 만들어낸 인격체로서의 신은 아닐 터, 스피노자 식으로 말하자면 우리가 신을 이해하는 유일한 방식은 그의 피조물들을 이해하는 것뿐이다. 레비나스의 의도는 신을 운운하기 전에 인간에 대한 예의부터 다 하라는 거야. 몰상식과 무례와 비겁으로 점철된 이들 중에도 교회에서는 집사님으로 불리는 경우가 꽤 있잖아.


  니체를 과연 무신론자라고 할 수 있을까? 아마 전공자들의 견해를 다를 것이다. 물론 그 ‘무신’이 어떤 개념인가를 먼저 따져봐야 하겠지만서도... ‘신은 죽었다’는 말은, 죽기 전에는 살아 있었다는 거잖아. 그는 인류가 말해온 신의 개념을 인문적 입장에서 비판했던 것. 신이란 명분으로 자행한 비인간적 역사들만 살펴도, 신에게 사형을 언도한 니체의 등장은 필요한 역사였다. 물론 그가 인간 지평 너머의 미지를 부정한 적도 없고, 그리스도만큼은 존경했으며, 디오니소스는 저 자신의 분신으로 여겼으니... ‘신은 죽었다’는 말이 지닌 역설은, 되레 극강의 신앙이라는 거. 인간의 지평에 갇히지 않는 신이 더 절대적이지 않겠어? 


  사르트르를 무신론자로 말하지? 사르트르에 대해 빠삭한 건 아니라서, 많은 말을 늘어놓을 수는 없지만... <존재와 무>에 언급되는 신은, 인간의 이해로 의미화된 대자적 존재다. 인용한 글에서 우연성을 극복했다는 문장이 그런 의미. 신 그 자신의 입장에서의 필연성이라기 보단 인간의 필요성이 투영된 경우잖아. 그 전제 하에서 타인에 대한 무한의 사랑을 신에게 빗댄 것. 하여 사르트르는 레비나스와 비슷한 견해를 적어놓기도 했다. 타자를 극으로 밀어붙인 것이 신이라고...


  <논어>에 나온 구절로 대신하자면, 

  未能事人 焉事能鬼 未知生 焉知死

  사람도 능히 섬길 줄 모르면서 어찌 귀신을 섬기며,

  삶도 다 알지 못하면서 어찌 죽음을 알려하는가?

작가의 이전글 사르트르, <존재와 무> - 이해와 오해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