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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쓰는 편집장 May 30. 2022

영국, 런던, 엑시비션 거리 - 존재와 시간

존재와 시간, 노마드

  런던 시내 한복판에는 도로 경계석도, 신호등도, 표지판도 없는 도로가 있단다. 길이가 820m에 이르는 이 직선 도로는 휠체어, 유모차, 카트 사용자들이 편하게 오갈 수 있도록, 차도와 인도의 높이가 같게 디자인을 했다. 인도와 차도를 구분하는 것은, 시각장애인들을 위한, 우툴두툴한 섬유띠를 덮어놓은 빗물 하수도가 전부.


  박물관과 미술관이 몰려 있는 이곳은 그전까진 교통지옥을 방불케 했던 거리였단다. 그러나 변화된 도로에서는, 운전자들과 보행자들이 서로에게 더욱 주의를 기울이게 되면서, 교통사고와 차량운행량이 급격하게 줄어들었다. 경계가 사라짐과 동시에 침범도 사라지고 공유가 시작된 것.

  이를테면,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 사르트르의 <존재와 무>. 경계가 있으면 그것에 준하는 규칙이 생겨나기 마련. 그런 시간성이 존재를 결정한다. 그곳에 경계가 사라지면, 다른 가능성들이 발생한다. 그것이 無의 형태로 잠재되어 있다.


  <존재와 무>에는 ‘부정’이라는 단어가 많이 등장하는데, 익숙해진 기존의 것, 그 사물화된 시간성을 부정하면서 새로운 것들이 채워진다. 


  익숙한 시간은 나의 인식의 조건으로 순환되기 마련. 이런 시간의 관성을 자각할 수 있는 건, 내가 관성대로 살고 있다는 사실을 자각시켜주는 사건이 도래하면서겠지. 기존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가능성, 아직 일어난 건 아니잖아. 그 관념의 형태를 無라고 말한 것.


  그러나 그런 새로운 것들도 시간이 지나면 다시 익숙해지겠지. 이 無를 계속 발생시키는 행위가, 들뢰즈의 노마드 개념. 때문에 들뢰즈는, 사르트르의 ‘결여’와는 견해를 달리하며, ‘생성’으로 말했던 것.

  며칠 전에 만나 뵌 PD 분께서, 대학교 강의를 마치고 돌아가는 길에 잠시 신림동에 들리셔서, 커피 한 잔 마시며 이런 저런 이야기를... 조금 있으면 영국에 공부를 하러 가시는데, 거기서의 생활상을 원고화하고 싶어 하시더라구. 어떤 방향성이면 좋겠냐고 물어오시길래, 존재와 시간과 무에 관한 이야기를, 하이데거와 사르트르의 언급 없이...


  우리가 나영석과 김태호의 경우만으로, PD란 직업을 바라보기도 하잖아. 그런데 들어보니 굉장한 반복 노동이더라구. 쳇바퀴 돌 듯 돌아가는 삶, 환기의 의미로 유학을 결정했다고... 그래도 10여 년을 PD로 일했으니, 삶을 바라보는 편집점도 남 다를 테고... ‘영국’ 그 자체보다는 PD님의 관점이 주제이지 않겠냐고... 그것은 자신이 겪어온 시간으로부터 발생하는 가능성이지. 고되고 힘들어서 벗어나고 싶은 일상이었을망정...


  사르트르도 그 이야기를 하는데, 존재와 시간이 선행해야 無도 발생하는 거지. 창작이란 것도 그렇지 않아? 쌓여온 시간의 결과이며 효과지. 직관이란 것도 그 시간성 위에서의 촉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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