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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쓰는 편집장 May 31. 2022

헤겔, 주인과 노예의 역설 - 돌쇠와 마님의 변증법

사르트르, <존재와 무>

  사실 주인과 노예의 그 치열하고 위험한 투쟁이 ‘나는 나다’라고 하는 빈약하고 추상적인 공식(公式)의 승인을 유일한 판돈으로 걸고 있다는 것은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 ...

... 사실, 만일 타자가 나에게 나의 ‘자기’를 나에게 가리키는 것이라면, 적어도 변증법적인 발전의 종국에 있어서는, ‘내가 그에게 있어서 있는 그대로의 것’, ‘그가 나에게 있어서 있는 그대로의 것’, ‘내가 나에게 있어서 있는 그대로의 것’, ‘그가 나에게 있어서 있는 그대로의 것’ 사이에 하나의 공통되는 척도가 있어야 한다. 확실히 이런 동질성은 출발점에서는 존재하지 않는다. 헤겔도 그것은 인정한다. 주인-노예의 관계는 상호적인 관계가 아니다. 그러나 헤겔은 상호관계가 세워질 수 있다고 그는 주장한다. - <존재와 무>, 동서문화사, 정소성 역, p407~408

 

  『방드르디, 태평양의 끝』에서의 로빈슨 크루소는 당대 영국의 제국주의 근성에 사로잡혀 있는 표상이다. 자신이 갇혀 있는 무인도를 영국의 식민지로 간주하고, 스스로를 총독에 임명하며, 무인도의 생태를 문명의 방식으로 재구조화한다. 굳이 이 무인도에서 말이다. 방드르디는 식민지 원주민의 입장으로, 문명의 입장에서는 교화의 대상이다. 단 두 명의 사람이 사는 무인도에서, 각각 주인과 노예의 역할로서 살아가고 있지만, 주인의 핍박에 시달린 노예가 도망치면, 주인은 다시 무인도의 외로움과 마주해야 할 처지다. 헤겔의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 『어린 왕자』에서 어느 별에 홀로 살고 있던 왕이 스치기도…. 투르니에 역시 굳이 무인도에서 문명의 메커니즘에 집착하는 로빈슨을 다소 우스꽝스럽게 그려 낸다. 그러나 소설 내에서 그의 입장으로 대변하자면, 단절과 고립의 와중에 미치지 않기 위한 처절한 노력이었다. - <세기의 책>, 디페랑스, 디오니소스, p187 -


  철학사에서 꽤나 유명한, 헤겔의 ‘주인과 노예의 역설’. ‘내가 생각하는 나’가 있고, ‘타인이 바라보는 나’가 있다. 그런데 타인마다 나에 대한 평가는 다를 수 있지. 그래도 그 모든 것을 아우르는 이미지가 있을 것 아닌가. 그러니까 내가 생각하는 것과 타인이 바라보는 것 사이에 놓여진 나 자체. 타인도 마찬가지지. ‘내가 바라보는 그녀’가 있고, ‘그녀 스스로 생각하는 그녀’가 있고, 그 사이의 그녀가 있다.


  그 맥락에서 주인은 노예의 입장을 이해할 수 없다. 노예 또한 주인을 그 자체를 이해하는 게 아니다. 공부 잘 하는 애들이 왜 저렇게 그것에 목을 매는지, 공부 못 하는 애들은 절대 이해 못하거든. 그게 뭐 그렇게 집착을 할 만한 가치라고... 나는 그녀를 이해할 수 없고, 그녀는 나를 이해할 수 없다. 우리가 서로를 이해한다고 믿는 건, 나와 그녀의 사이에 놓인 어떤 이미지다. 이건 타인의 입장이라기 보단, 나의 시선이 타인에게 닿고 되돌아오는 결과다. 


  노예는 사물을 다루면서 보다 많은 자연의 이치를 이해한다. 주인은 그런 노예를 부리지만, 노예가 없으면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노예만큼 자연을 이해하는 건 불가능하기 때문에... 마르크스가 이 도식을 인용해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의 관계를 설명했던 것. ‘변증법적 유물론’이란 헤겔의 관념론을 매개한 유물론이란 의미.


  우리의 고전에서 찾아보자면, 마님과 돌쇠의 변증법. 마님이 돌쇠에게 쌀밥을 건넨 그 순간부터, 마님은 돌쇠로부터 벗어날 수 없고, 돌쇠는 계속 쌀밥이 먹고 싶다. 그 입장 차의 극간을 뭉뚱그리는 캐치프레이즈, “쇤네는 마님 밖에 없구만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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