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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쓰는 편집장 Jun 08. 2022

<러브, 데스, 로봇> 2, '거인의 죽음' 해석

<걸리버 여행기>, '거인국 편'

   몇 년 전에 한 이웃 분이, <러브, 데스, 로봇> '지마 블루(Zima Blue)'의 해석을 부탁하셔서, 또 제 버릇대로 철학의 키워드들로 작성해 놓은 글이 있는데, 요즘 며칠 동안 유입이 많아서 뭔가 싶었는데... 넷플릭스에서 3편이 방영되었네. 난 2편이 나온 것도 모르고 있었는데...


  데이빗 핀처가 제작을 맡았다. 옴니버스의 시리즈임에도 한 크리에이터의 역량이 미치는 범주란... 2편부터 몰아 봤는데, 인상적인 에피소드가 많지만, 해석의 욕망이 닿는 건 <거인의 죽음>이란 편.


  누가 봐도 <걸리버 여행기>를 모티브로 하는 것 같잖아. 거인의 의미는 뭘까? 문헌학자로서의 니체가 해석한 타이탄족은 자연이 지닌 힘이다. 아직 자연의 원리를 이해하지 못했던 인류에게는 아직은 ‘우연’이었던... 하여 니체는 ‘거대한 우연’이라고 표현한다. 이 영화에서도 거인은 옷을 입고 있지 않고 있다. 그리스 신화에서 인류에 불을 훔쳐다 준 거인이 프로메테우스, 인류를 창조한 장본인이기도 했고, 그로 인해 인류에게 문명이 발생했고...


  <걸리버 여행기>에서 ‘거인국’ 편에서는 거인들의 비밀이 밝혀지는 페이지가 있다. 원래 인류는 거인족이었다. 자연을 극복하는 문명의 방법론들이 점점 더 발전해 감에 따라 자연은 점점 기력을 잃어가기 시작했다. 그 결과 자연은 이전에 비해 조그맣고 불완전한 생물만을 생산한다. 그 축적에 적응한 인간도 왜소해져 갔다. 미야자키 하야오가 <원령공주>에서 보여준 태고적 자연의 거대함도 그런 사연을 지니고 있었잖아.


  정신분석으로 해석래 보자면, ‘에로스와 문명’이란 키워드다. 문명의 훈육 속에서 우리는 자연성을 점점 잃어간다. 그 결과, 거대한 무의식의 열망보다는, 그 사회가 미리 지정한 자리에 맞추려는 부속품으로 살아간다. 그리고 어느 순간부터 그 열망의 시간을 기억하지 못 하게 된다. 기억하지 못할 뿐, 그 열망은 아직 무의식에 남아 있지. 그 알 수 없는 일렁임을 의식의 차원에서 해소하려 하니 해소가 되나. 그래서 방편으로 택하는 것이 그 사회가 공증하는 가치를, 이를테면 돈을, 욕망하는 반복과 순환.


  물론 돈은 중요하지. 그런데 또 행복해지려고 돈을 욕망하는 거 아니야. 그 결과가 행복이 아니라면, 다시 돌아봐야 하는 문제인 게 아닐까? 정신분석도 시장에서 자유로워지라는 말 같지 않은 말을 건네고 있는 게 아니다. 가리는 것이 있으니, 가리워진 것이 발견될 수도 있는 거지. 그래서 라캉이 상징계가 실재계의 전제라고 말했던 것.


  정신분석에서는 유년시절의 기억이 중요하다. 아직 우리가 사회적(상징계) 가치에 물들지 않은 시절에 지녔던 열망에 관하여... 물론 무작정 유년시절을 긍정하라는 말도 아니다. 밉살맞게 굴면 내 조카도 미울 마당에... 우리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어디선가 무언가 멈춰버린 그 지점을 돌아보라는 거야.


  <거인의 죽음>이 그런 의도의 스토리는 아닌 것 같다. 그냥 모티브만 가지고서 내 해석을 개진해 보고 있다. 그것이 존재했다는 사실을 여전히 기억한다는 내레이션도 내게는 그렇게 들렸다. 그런 시절이 있었다는, 그 시절의 내가 나이 들어 지금의 내가 되었다는 사실이 믿겨지지 않는 순간들도 있잖아. 그럼에도 우리 모두가 기억하잖아. 그토록 큰 열망이 분명 존재했었다는 사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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